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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과 2021년, 히말라야 8000m에 매달린 두 사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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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6호 17면

넷플릭스 신작 소재 된 맬러리와 님스

높은 산을 왜 오르는 걸까. 그래서 물어봤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는 겁니까?”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다. “왜 8000m 산에 오르려는 겁니까?” “우리도 할 수 있으니까요.”

니르말 님스 푸르자가 8000m급 14개 봉우리 최단 기간 등정을 위한 '프로젝트 파서블' 중 2019년 5월 22일 에베레스트에 오른 뒤 하산하면서 찍은 사진. 세계 최고봉의 정상으로 향하는 구간에 등반가들이 몰려있는 이 장면은 당시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됐다. [AP=연합뉴스]

니르말 님스 푸르자가 8000m급 14개 봉우리 최단 기간 등정을 위한 '프로젝트 파서블' 중 2019년 5월 22일 에베레스트에 오른 뒤 하산하면서 찍은 사진. 세계 최고봉의 정상으로 향하는 구간에 등반가들이 몰려있는 이 장면은 당시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됐다. [AP=연합뉴스]

앞서 문답은 어디서 들어봄 직하다. 넷플릭스에서 신작으로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신들의 봉우리’는 에베레스트(8848m)에서 산화한 영국의 조지 맬러리(1886~1924)가 모티브다. 뒤의 문답 주인공은 니르말 님스 푸르자(38,자신을 ‘님스다이’로 부르는데 ‘다이(dai)’는 네팔어로 형제를 뜻함). 또 다른 넷플릭스 신작인 다큐멘터리 ‘14좌 정복(14 peaks)’에 등장한다. 맬러리와 님스. 넷플릭스는 100년 가까운 차이의 두 산악인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올렸다. 두 사람은 8000m급 산에 대한 최초와 최근의 도전자다.

‘신들의 봉우리’ 소설·만화 이어 애니로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 뒷줄 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앤드루 어빈, 조지 맬러리다. [중앙포토]

1924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 뒷줄 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앤드루 어빈, 조지 맬러리다. [중앙포토]

1923년 5월 18일자 뉴욕타임스 . 조지 맬러리와의 인터뷰를 담았다. [중앙포토]

1923년 5월 18일자 뉴욕타임스 . 조지 맬러리와의 인터뷰를 담았다. [중앙포토]

맬러리의 대답은 산악 관련 명언으로 꼽힌다. 1923년 뉴욕타임스(NYT) 기자와의 인터뷰 중 나온 말이다. 맬러리가 진정성은 팽개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NYT 기자가 만들어낸 말이다 등 온갖 설이 있다.

100년 전인 1921년. 맬러리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1차 원정대 대원이었다. 1차 대전 뒤의 영국은 다급했다. 전쟁에 시달린 국민의 사기를 북돋아야 했다. 지구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매달렸다. 1차 원정 때는 맬러리가 에베레스트 북동능선 루트를 찾아냈다. 3차 원정인 1924년 6월 4일, 맬러리는 앤드루 어빈(1902~1924)과 함께 정상 공격에 나섰다.

1924년 6월 6일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에서 캠프4를 떠나는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 이들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중앙포토]

1924년 6월 6일 에베레스트 3차 원정대에서 캠프4를 떠나는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 이들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중앙포토]

지원조인 노엘 오델은 등반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6월 8일 오후 12시 50분, 7925m 지점에 다다라서 처음으로 온전한 형태의 화석을 발견하고는 뛸 듯이 기뻤다. 갑자기 시계가 명료해졌다… 능선의 바위 구간 밑에 두 개의 점이 보였다. 하나의 점은 바위 돌출부위를 넘어 다른 하나의 점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다시 흐려졌다."

두 개의 점, 즉 맬러리와 어빈은 미지의 세계로 사라졌다. 그들은 정상에 올랐을까. 넷플릭스 ‘신들의 봉우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신들의 봉우리’는 『음양사』로 알려진 유메마쿠라 바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이후 『고독한 미식가』 등을 그린 다나구치 지로가 만화로 만들었다. 2016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산악 소설’ ‘산악 만화’라며 ‘산악’으로 선을 긋기에 이 작품은 인기가 많다. 배성우 한국산서회 총무이사는 “산과 관련한 작품은 대부분 산행기나 등반기인데, 픽션이 가미된 ‘신들의 봉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버전으로 변신하면서 산악인은 물론 폭넓은 층이 빠져드는 콘텐트”라며 “스토리텔링, 미스터리, 스릴, 휴머니티를 고루 간직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맬러리는 에베레스트에서 사라진 지 75년이 지난 1999년에 발견됐다. 에베레스트 북벽 8157m 지점이었다.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한 등반가 콘래드 앵커는 그 시신의 등산복에 박힌 G. Leigh. Mallory라는 이름을 확인했고 런던의 한 등반장비업체 상호가 적힌 영수증과 편지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항상 품 안에 간직했던 아내 사진은 없었다. 고글은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다. 정강이뼈와 비골, 정수리에 손상이 있었다. 허리에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로프 자국이 선명했다. 소지하던 코닥 포켓 사진기는 없었다. 이 사진기는 ‘신들의 봉우리’ 이야기를 펼친다. 소설 『신들의 봉우리』 수정본이 지난해 국내 출간됐다. 맬러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소설도 고친 것이다.

외신에 따르면, 맬러리의 생애를 다루는 영화 '에베레스트(감독 더그 리만)'가 현재 촬영 중이다. 주연은 트레인스포팅·스타워즈 등에 출연한 영국 배우 이완 맥그리거(50)로 알려져 있다.

 1924년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지 75년 만인 1999년에 에베레스트 북벽 8157m 지점에서 발견된 조지 맬러리의 시신. [중앙포토]

1924년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지 75년 만인 1999년에 에베레스트 북벽 8157m 지점에서 발견된 조지 맬러리의 시신. [중앙포토]

다시 100여 년 전. ‘Obterras London-Mallory Irvine Nove Remainder Alcedo-Norton Rongbuk.’ 암호로 만들어진 한 통의 전보가 티베트에서 영국으로 날아갔다. 1924년 6월 19일이었다. 맬러리와 어빈의 사망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에베레스트에 있던 맬러리가 아내 루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1924년 5월 27일 작성)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촛불이 다 타들어 가고 이제 그만 써야겠소.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당신의 걱정은 사라질 것이오. 빨리 당신에게 좋은 소식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요. 무한한 사랑을, 당신의 영원한 조지.’ 이 편지는 사망 전보보다 늦게 도착했다. 루스는 아이 셋을 침대 위로 불러 아버지의 소식을 전했다.

“더 어려운 루트, 어떻게 오르냐가 관건”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신들의 봉우리’. [넷플릭스 캡처]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애니메이션 ‘신들의 봉우리’. [넷플릭스 캡처]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14좌 정복(14 PEAKS). [넷플릭스 캡처]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14좌 정복(14 PEAKS). [넷플릭스 캡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등반가입니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산악 다큐 ‘프리 솔로’의 제작자이자 등반가인 지미 친(48)은 님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리 솔로'는 아무런 안전장비 없이 요세미티의 거벽을 등반하는 알렉스 호놀드(36)를 다룬다. 님스가 2019년에 6개월 6일 만에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올랐다. 이전 최단 14좌 등정 기록은 7년이었다. 넷플릭스 신작 ‘14좌 정복’은 이 여정이다. 등반대 구호가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이다.

맬러리 이후 영국의 9차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1953년 5월 29일, 마침내 그 목표를 이뤘을 때 주역은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였다. 그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1914~1986)는 엑스트라였다. 텐징이 먼저 에베레스트 꼭짓점에 올라 힐러리를 도왔다는 설도 있지만, 네팔의 셰르파들은 철저히 외국 등반가들의 조력자에 그쳤다.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 님스가 말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말이다. 그는 영국 국적이지만 네팔 태생이다. 네팔 셰르파들로 원정대를 꾸렸다. ‘주마간산 속도전’ ‘상업등반에 기댄 보여주기 등정’이라는 혹평도 따르지만, 8000m급 14개 봉우리를 반년 만에 오른 건 화제를 넘어 충격이다.

지난 1월 5일 네팔 산악인들이 동계 K2 등반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네팔 산악인들은 한겨울에 8000m급 14개 봉우리 중 유일하게 동계 등정이 이뤄지지 않은 K2에 올랐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월 5일 네팔 산악인들이 동계 K2 등반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네팔 산악인들은 한겨울에 8000m급 14개 봉우리 중 유일하게 동계 등정이 이뤄지지 않은 K2에 올랐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런데 이 님스가 이끄는 네팔 등반대가 지난 1월 16일 8000m급 최후의 난제인 K2(8611m) 동계 등정에 성공했다. 보통 동지인 12월 21일부터 춘분인 3월 21일 사이를 동계 등반 기간으로 본다. 8000m급 동계 등반은 ‘고통의 예술’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혹독함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K2 정상 부근의 바람은 시속 200㎞까지 올라가고 기온은 영하 60도까지 내려간다. 등반자 3명 중 1명이 사망하는 악명 높은 산이다. 우리나라 7번째 14좌 등정자인 김미곤(49) 대장도 지난해 K2 동계 등정을 계획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올해로 연기했다. 하지만 네팔에서 먼저 등반대를 조직했다. 김미곤 대장은 “네팔 팀에서 함께 하자며 연락이 왔지만, 코로나19와 일정상 정중히 사양했다”고 밝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코로나19로 각국의 원정대가 네팔 입국을 못 한 것도 네팔 팀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K2 동계 등정에 세 번(1987~88, 2002~2003, 2017~2018) 나서 세 번 모두 물러난 겨울 등반의 강국 폴란드(8000m급 14개 봉우리 중 10곳 동계 등정, 한 차례는 연합팀)도 손발이 묶였다. 폴란드 산악인 크르지스토프 비엘리치(71)는 “우리의 경쟁자인 러시아·카자흐스탄·이탈리아·스페인이 성공했다면 기분이 안 좋았을 텐데, 네팔인들이 스스로 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추켜세웠다.

세계 최초로 K2 동계 등정에 성공한 네팔 원정대가 지난 1월 21일 카트만두 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맨앞이 니르말 님스 푸르자. [AFP=연합뉴스]

세계 최초로 K2 동계 등정에 성공한 네팔 원정대가 지난 1월 21일 카트만두 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맨앞이 니르말 님스 푸르자. [AFP=연합뉴스]

지난 1월 16일의 K2 정상에는 네팔 국가가 울려 퍼졌다. 네팔 등반대 10명은 어깨동무를 하며 동시에 정상에 올랐다. 님스는 “우리의 모든 산을 외국인들이 올랐지만, 마지막 난제인 겨울의 K2는 우리가 올랐다”며 감격했다. 이용대(85)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은 “네팔인과 셰르파들이 8000m 세계의 주연임을 스스로 드러낸 사건”이라며 “이제 8000m 정복의 시대는 저물고 있고 꼭대기를 오르는 ‘등정’보다 6000m, 7000m급 미답봉으로, 더 어려운 루트로 오르는 ‘등로주의’로 완전히 기울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1922년 6월 7일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 조지 맬러리가 이끈 이 사진 속의 대원 대부분은 눈사태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1922년 6월 7일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 조지 맬러리가 이끈 이 사진 속의 대원 대부분은 눈사태로 사망했다. 중앙포토

100여 년 전인 1922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2차 원정대에도 속한 맬러리는 노스 콜(North Col)에서 7명을 잃었다. 모두 셰르파들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 사상 최초의 사망자들이었다. 하지만 엑스트라에서 이제는 주연으로, 네팔 산악인들이 자신의 산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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