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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그룹 중 7곳 정기 공채 중단, 수시로 뽑는다지만…청년 일자리 상반기 10만개 줄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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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6호 08면

[SPECIAL REPORT]
공채의 종말

SK그룹은 10월 그룹 차원의 마지막 정기 공개채용 필기시험인 종합역량검사(SKCT)를 치렀다. [뉴스1]

SK그룹은 10월 그룹 차원의 마지막 정기 공개채용 필기시험인 종합역량검사(SKCT)를 치렀다. [뉴스1]

“기업들이 상시 혹은 수시채용을 진행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취업문이 좁아진 느낌입니다. 수시채용이나 상시채용은 뽑는 인원도 적고, 요구 조건이 구체적이어서 원하는 기업의 채용 공고가 나와도 지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거든요”. 최근 SK이노베이션 하반기 정기 공개채용에서 고배를 마신 취업준비생 안모(29)씨는 “미련 없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들어간 이유는 대기업이 공채를 없애거나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SK이노베이션만 해도 이번 공채가 그룹 차원의 마지막 정기 공채였다. 안씨는 “공채만 바라보고 더 이상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며 “무엇보다 지금 갖고 있는 학위나 자격증에 맞는 채용 공고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게 불합격보다 더 가혹하다”고 말했다.

“지방대생에게 수시 채용은 넘사벽”

기업 경영 환경이 급변하면서 사원 채용 방식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정기 공개채용을 줄이고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채용하는 수시(상시)채용 방식이 늘어나고 있다. 공채는 한 번에 대규모 인력을 선발해 각 계열사에 투입하는 방식인 반면, 수시채용은 시기나 절차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 인력이 생기면 그때그때 공고를 내고 채용하는 방식이다. SK그룹은 올해 하반기 공채를 마지막으로 내년부터는 수시채용에 들어간다. 그룹 차원의 공채가 아예 사라지는 것이다. 롯데그룹은 올해 상반기 공채가 마지막 그룹 정기 공채였다. 지난해 공채를 없앤 LG그룹은 올해부터 수시로 필요 인력을 확충하고 있다.

10대 그룹 가운데 공채를 유지하는 곳은 삼성전자 등 3곳뿐이다. 이는 비단 대기업만의 트렌드가 아니다. 매년 공채를 통해 대규모 인력을 채용하는 금융권에서도 공채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국내 5대 은행 가운데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은 올해 공채를 진행하지 않았다. 취업정보사이트 인크루트에 따르면 올해 대기업 채용 가운데 정기 공채는 29.4%에 불과한 반면 수시채용은 58.8%에 이른다. 2019년 공채가 60%, 수시가 25.6%였던 것을 감안하면 2년여 만에 정반대 상황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공채와 수시채용의 장단점이 뚜렷한데, 최근 기업 환경 변화가 수시채용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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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실제로 주요 대기업은 공채를 없애는 이유로 경영 환경과 기술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입을 모은다. 현대차의 한 인사담당자는 “전처럼 대규모로 신입사원을 뽑고 교육시켜 현업 부서로 보내서는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며 “수시채용은 채용한 인력을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가 제조업을 중심으로 고도성장하던 시기엔 기술 축적이 기업의 경쟁력으로 여겨진 까닭에 신입사원을 선발해 차근차근 업무 능력을 쌓도록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입사원을 뽑아 기수를 매기고 연차에 맞는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공채가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어서 신입사원을 뽑아 이들이 역량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인재를 즉시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채용 제도가 필요해진 것이다. 또 다른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수시채용은 현업 부서에서 스펙이 아닌 실제 업무에 필요한 직무역량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공서열로 대표되는 기수 문화 대신 성과주의가 부상한 것도 공채 실종의 원인으로 꼽힌다. 공채가 기업들의 채용을 전담할 땐 입사 시기가 빠르다는 이유로 높은 급여를 받는 것이 당연시됐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분위기가 기업들 사이에서 팽배하다. 성과주의를 강조한 인사 제도를 적용하기 위해선 공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롯데지주의 한 관계자는 “공채를 실시하면서 생긴 기수 문화와 순혈주의 대신 철저하게 능력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점은 수시 채용에 기대하는 부분”이라며 “기존 직원들의 기수도 삭제하고 앞으로도 기수를 부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대기업 등 민간 기업의 공채가 사라지면서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층, 특히 막 대학을 졸업했거나 졸업 예정인 학생들의 취업문이 더욱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채는 대학 졸업생이나 예정자 등 대학을 갓 졸업한 지원자가 합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수시채용은 전문성을 중시하므로 경력자 즉, 해당 직무 경험 등이 있는 인재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나이로 보면 대개 30대 중후반부터다. 일각에선 여전히 공채를 유지하면서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 만큼 수시채용을 신규 채용을 줄이기 위한 편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의 공채는 단지 기업이 필요 인력을 뽑는다는 의미보다는 청년층의 일자리 확대라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의미가 컸다”며 “수시채용 확대는 이 같은 기업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력자는 이직 기회 많아져  

젊은층 사이에서 공채 폐지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소재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김모(26)씨는 “기업이 원하는 자격을 갖춘다 해도 언제 채용 공고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기업 입사만 바라보고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라며 “공무원 준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데 우리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지방대생에겐 수시 채용의 벽이 더욱 높게 느껴진다. 대기업 본사 상당수가 서울에 몰려 있는 탓이다. 대구에 거주하는 취준생 김모(26)씨는 “수시 채용이나 상시 채용은 실무 능력 평가 기간이 길거나 아예 인턴 기간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며 “서울 거주비나 교통비 등의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리적 여건으로 인턴과 같은 기회조차 잡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공시생’만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5월 기준 공시생은 1년 전보다 5만 명가량 늘었는데, 이 기간 민간 기업 입사를 준비 중인 청년은 19만8500명에서 19만 명으로 줄었다. 기업들도 할 말은 있다. 기업 변화에 맞춰 불가피하게 수시채용으로 전환했고, 일자리 확대를 위해 공채 때만큼 수시로 채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요셉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력직 수시채용이 확대되면서 노동시장 전체로 봤을 땐 좋은 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과거 공채로 합격하지 못하면 갈 수 없었던 기업들이 대거 경력직을 선발하고 있기 때문에 ‘이직’ 기회가 넓어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경력직을 원하는 기업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신입사원, 취업자 중 20대 청년 비율은 아무래도 낮을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형 건설회사 관계자는 “그룹 공채가 없어지고 나서 각 부서에서 경력자를 뽑기는 하지만 신입사원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전했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386만4000개였던 청년(15~29세) 일자리는 올해 1분기 382만8000여 개로, 2분기에는 372만4000개로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공공근로 일자리에 힘입어 일자리가 60만 개 이상 늘어난 50~60대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김용춘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정책팀장은 “경영 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 수시가 늘어나는 현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취업이 어렵다 해도 기업들의 인력 수요가 몰리는 분야에선 일자리 미스매치가 일어나는 만큼 전공 정원의 유연성을 부여하는 등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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