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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영혼 갉아먹는 '검은 목소리'…엄마는 아이 앞 목숨 끊으려 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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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보이스피싱 '비대면 시대' 위험은 커지고 치유는 더디다 

두 아이의 엄마 A씨(30대)는 지난 2019년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최○○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피해로 3000만원을 잃은 뒤였다. 어머니의 유산 2000만원이 포함된 소중한 재산이었기에 상실감이 극에 달했다. 당시 우울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목숨은 건졌지만, 첫 돌이 채 안 된 첫째 아이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A씨는 이후 죄책감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피해자의 재산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갉아먹는다. 자책감 등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해 2월 한 취업준비생이 ‘김민수 검사’ 사칭범에게 420만원을 잃고 세상을 등졌다.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 배우 지망생도 20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잃고 극단 선택을 했다. 남은 가족들은 보이스피싱이 단순 사기를 넘어 살인에 준하는 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자 76% ‘두려움’ ‘죄책감’ 등 호소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의 상처는 깊었다. 중앙일보가 보이스피싱예방협회와 공동으로 한 달간(10월 28일~11월 28일) 보이스피싱 피해자 6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두려움’ ‘분노’ ‘죄책감’ 등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 비율이 76.2%(48명)에 달했다. 불면증을 겪고 있거나(63.5%· 40명), 우울증 치료를 받는 경우(25.4%·16명) 등이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해 봤다는 답변도 6.3%(4명)로 나타났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 대다수는 정신적 피해와 금전적 피해를 병행해서 본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금전적 구제가 되더라도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사회와 주변인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아져 근본적인 치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나 자치단체 또는 민간단체 어디에도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고 지적했다.

상처로 남은 ‘검은 목소리’... 정신적 피해 살펴보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상처로 남은 ‘검은 목소리’... 정신적 피해 살펴보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인터넷 뒤져 해법 찾는 피해자들 

보이스피싱은 살인이나 성폭력 등 강력범죄피해와 달리 전담기구가 없어서 딱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어렵다. 보이스피싱 대출 사기로 4000만원을 잃은 B씨(60대·남)는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대응체계가 없어 막막했다”며 “인터넷을 검색해 피해자들이 공유하는 주먹구구식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이어 “심리적 어려움을 느껴 구청에 물어봤더니 상담받는 곳을 소개해줬지만, 보이스피싱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 아니었다. 가정의학과에 가서 안정제를 처방받았다”고 말했다.

피해자 중 일부는 수사기관을 통해 정신적 피해 복구에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C 씨(30대·남)는 “경찰서에서 협약을 맺은 민간기관에 심리치료를 연계해줘 무료로 받을 수 있어 도움이 됐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위한 경찰서 내 심리지원 방법.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위한 경찰서 내 심리지원 방법.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비대면 사회가 이젠 위험 요소”

비대면으로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범죄이지만, 피해자는 대면 범죄 못지않은 고통을 겪게 된다. 전문가들은 ‘금전 거래에 대한 개념 정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금융기관이나 공공기관의 요청에 의한 거래는 창구에서 대면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명확하게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황석진 교수는 일상에서 익숙해진 ‘비대면 소통’을 위험 요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는 “비대면 소통이 발달하면서 직접 보지 않고도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자체가 큰 위험 요소가 됐다. 특정한 행위를 요구받을 때는 직접 확인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완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이스피싱도 긴급 재난 상황처럼 피해 사례와 함께 주의를 필요로 하는 알림 문자 등을 발송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위험성이 커진만큼 그 피해 회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4000만원을 사기당한 60대 남성은 “신용평가를 할 때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피해는 참작해줘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사기까지 당하고 높은 금리로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면 삶의 의지를 꺾을 뿐 아니라 헤어나올 방법을 못 찾게 하는 것”이라면서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한 뒤 신용 점수 하락, 기존 대출 상환 압박 등이 이어지면 이중, 삼중의 불안과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 약자에게 피싱 피해 죽음 같은 고통” 

법무부가 운영하는 ‘범죄피해자구조금’ 제도가 있지만,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 적용되지는 않는 게 현실이다. 법무부 인권구조과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는 범죄피해자 구조금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지원대상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피해가 커진만큼 정신적 피해 등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완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지원하는 독립된 특별대책기구를 마련해 재산 피해 회복을 우선적으로 돕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치료할 심리 상담기관도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보이스피싱 피해는 곧 죽음과 같다”며 “형사범죄피해자 보호 범위를 확대해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피해자 지원 예산을 마련하고 구제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은 7000억원이 넘었습니다. 테슬라가 한국에서 올린 매출과 비슷합니다. 언택트 사회의 고도화에 맞춰 보이스피싱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사회 시스템을 맹신한 피해자의 충격과 자책은 더 큽니다. 중앙일보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과 수사 기관 및 금융 당국 관계자들을 밀착 취재해 14회에 걸친 기획 〈목소리 사기 7000억 시대〉를 준비했습니다. 12월 13일(월)부터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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