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선

이재명을 모르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7일 서울대 강연에서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님이라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이라는 건 맥락이 있다. 맥락을 무시하면 진짜 문제다”라고 덧붙였다.

국토보유세, 재난지원금 등 두고 #너무 자주 바뀌는 이 후보의 말 #집권하면 '국민 뜻'은 떠받들까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7일 서울대에서 열린 금융경제세미나 초청 강연회에 참석해 경제정책 기조와 철학을 주제로 자유토론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7일 서울대에서 열린 금융경제세미나 초청 강연회에 참석해 경제정책 기조와 철학을 주제로 자유토론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왜곡하지 말고 맥락을 중시하라고 하니, 그가 박 전 대통령 앞에 ‘존경’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때로 돌아가 보자. 이 후보는 지난 3일 전북 전주에서 청년들과 소맥 회동을 하는 와중에 “이재명이라는 이름을 연호하는 걸 청년에게 원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고 “정치인은 지지를 먹고 산다. 소심하고 위축되고 이럴 때 누가 막 (응원)해주면 자신감이 생기고 주름이 쫙 펴진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존경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대통령 하시다가 힘들 때 서문시장을 갔다는 거 아닌가”라고 예를 들었다. 즉 누가 ‘박근혜를 존경하냐, 미워하냐’고 물은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다른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꺼낸 얘기다.

이 후보가 평소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하여 특별히 의미를 두기보단 ‘존경하는 의원님’처럼 상투적인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나흘 만에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라며 조롱하듯 본인 말을 뒤집은 것이다. 당장 온라인 등에서 “특검하자 했더니 진짜 특검하는 줄 알더라” “조국 사과한다고 했더니 진짜 사과하는 줄 알더라” 등 패러디가 쏟아졌다.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21주년 기념식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화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21주년 기념식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대화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 후보의 대표 정책기조로는 전국민 재난지원금, 기본소득, 국토보유세 등이 꼽힌다. 선별 복지보다는 보편 복지가 정치 철학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후보는 지난달 18일 페이스북에 “지금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렵다”며 “(재난지원금) 지원의 대상과 방식을 고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전국민 재난지원금 철회였다. 지난달 29일 채널A와의 인터뷰에선 국토보유세와 관련해 “국민이 반대하면 안 한다. 증세는 국민이 반대하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투기 근절을 위해 모든 토지에 세금을 매기는 국토보유세를 신설하고, 이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건 그의 대표 공약이었다. 국토보유세에 대해 한발 물러서면서 기본소득 역시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를 두고 민주당은 “유연한 이재명”이라고 적극 홍보했다.

그랬던 이 후보가 7일 서울대 강연에선 “전국민 재난지원금, 국토보유세 얘기했다가 반대 여론 높아지니 철회했다. 대통령 되면 국민연금 개혁, 건강보험 개혁 같은 과제를 추진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철회한 적 없다. 철회가 아니라 기본적 원리를 말한 거다”라며 또 다른 말을 했다. 도대체 뭐가 맞나. 문득 “천하의 아귀가 왜 이리 혀가 길어”(영화 ‘타짜’)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선거를 앞둔 변신,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2년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를 외쳤듯 우파는 좌클릭하고 좌파는 오른쪽 깜빡이를 켠다. 산토끼를 잡아야 해서다. 그렇다 해도 이 후보처럼 널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지난달 2일 선대위 출범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 제조업 중심 산업화의 길을 열었듯 이재명 정부는 탈탄소 시대를 질주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에너지 고속도로’를 깔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비전에 ‘독재자’라던 박정희를 굳이 끌어들였다.

또 지난달 17일엔 대학생들과 만나 “나는 사실 시장주의자다. 시장 대응을 믿고 가격통제는 별로 안 좋아한다”라면서 “돈 많은 사람이라면 한강이 보이는 남산 위의 전망 좋은 아파트를 평당 10억에 주고 살 수도 있다. 굳이 그걸 왜 무시하느냐. 자본주의 사회에서”라고 말했다. 평당 10억 아파트도 괜찮다는 시장 신봉자가 음식점 허가총량제를 하자는 건 또 무엇인가.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5일 오전 전북 정읍 샘고을시장을 방문해 즉석 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5일 오전 전북 정읍 샘고을시장을 방문해 즉석 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말을 툭하면 뒤집는다, 정책이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이 후보가 내세우는 건 ‘국민 뜻’이다. “정치인은 국민의 대리인이다. 국민을 지배하는 사람이면 자기 신념을 관철하지만, 국민을 대리하는 사람은 국민 뜻을 따른다. 바람직한 일이라도 국민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6일 MBC 인터뷰)는 말을 자주 한다. 그가 강조하는 국민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조변석개하는 여론에 따라 정책을 바꿀 것인지 따져봤자 소용없다. 현란한 말솜씨로 이 정도는 가볍게 눙칠 것이 뻔하다. 다만 ‘국민 뜻’이라던 이 후보가 정작 집권하면 이러지 않을까 싶다. “리더는 고독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거센 저항에도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를 택했다. 비록 일부 국민이 반대해도 국가 미래를 위한 길이라면 꿋꿋하게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이재명은 알 수 없다’는 것만은 이제 많은 이들이 알아가는 듯싶다.

최민우 정치에디터

최민우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