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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보이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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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페어런츠팀장

김현예 페어런츠팀장

낯선 지역인 아일랜드 메이요주에 이삿짐을 풀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을 터다. 자신의 이름이 이런 방식으로 후대에 널리 쓰이게 될 줄 말이다. 잉글랜드인 찰스 보이콧(1832~1897)의 이야기다. 40대 초반의 혈기왕성했던 그는 지주인 한 백작의 의뢰로 토지 관리를 맡게 된다. 그가 소작농에게서 토지 이용료를 거둬들여 얻는 수입은 이용료의 10%. 농사도 짓고, 토지 관리만 잘하면 꽤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정착해 7년 만에 분쟁이 일어났다.

추수를 앞둔 1880년 9월의 어느 날. 흉년이 들자 소작농들은 연맹을 만들어 토지 이용료 삭감을 요구하고 나섰다. 농사를 짓고 싶은 농부들은 넘쳐나고 땅은 부족한 상황이니 지주는 이용료를 내려줄 리가 만무했다. 이용료 삭감은 언감생심. 급기야 퇴거 통지를 받게 되자, 농부들은 찰스 보이콧을 단체로 응징하기에 이른다. 마을 가게에선 그에게 빵 조각 하나조차 팔지 않았다. 우편물 배달도 이뤄지지 않았고, 빨래나 청소를 대신하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췄다.

문제가 된 건 추수였다. 수확철이 왔건만, 일꾼들은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일하려 들지 않았다. 고심하던 그는 한 신문사에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글을 보냈고, 기자들이 몰려들면서 소식은 널리 퍼졌다. 11월 초, 추수를 위해 일꾼 50명이 나타났지만, 소동을 우려해 경찰 등 호위 인력이 등장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지역 농부들과의 갈등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가족들과 함께 11월 말, 도망치듯 잉글랜드로 떠났다.

부당한 행위에 대항한 거부의 의미로 쓰이는 ‘보이콧’이란 말은 이후로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내년 2월 열리는 겨울올림픽 뉴스에 종종 등장하고 있다. 중국 내 인권문제를 들어 올림픽에 정부 사절단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미국이 시발점이 됐다. 중국이 “정치적 모욕”이라며 보복까지 시사했지만, 미국 편에 서는 나라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동참을 선언했고, 이웃 나라 일본 역시 저울질 중이다. 우리 정부는 어떨까.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면서도 “참석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째깍째깍, 시간은 간다. 우리 정부의 진짜 외교력이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