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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예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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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헌법에는 준(準)예산의 근거가 나온다. ‘새로운 회계연도가 개시될 때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한 때에는 정부는 국회에서 예산안이 의결될 때까지 전년도 예산에 준하여 집행할 수 있다(54조3항)’는 내용이다.

예산안이 통과하지 못했을 경우, 전년과 동일하게 예산을 집행해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지방자치법 131조는 지자체 역시 준예산 집행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가 준예산을 집행한 사례는 아직 없다. 그렇다고 예산안 처리가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국회는 2013년과 2014년 예산안을 해를 넘긴 1월 1일 새벽에 처리했다. 휴일인 신정 다음날, 즉 1월 2일부터 회계연도가 시작하기에 가까스로 준예산 사태를 피했다. 국회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2014년 국회선진화법을 도입했다. 여야가 예산안 합의에 실패할 경우,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 부의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에는 준예산 사례가 있다. 경기도의회는 2016년 1월 28일에야 임시회 본회의를 열어 경기도와 도교육청의 그해 예산안을 의결했다. 누리과정 예산 편성을 두고 도의회가 여야 마찰을 빚으면서, 한 달 가까이 준예산 사태가 이어졌다. 경기 성남시도 2013년 시의회의 예산안 처리가 일주일간 지연되면서 공공근로와 시민강좌 등 민생사업이 중단되는 혼란을 겪었다.

최근 서울시 예산안을 둘러싼 갈등이 심상찮다. 시의회는 예산안 심사에서 안심소득·서울런 등 오세훈 서울시장의 핵심정책 예산을 삭감했다. 반면 서울시가 깎은 교통방송(TBS) 출연금은 전년보다 늘렸다. 시의회는 더불어민주당이 다수(110석 중 99석)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시는 “TBS 출연금 증액에 대해 부동의한다. 증액 부동의 예산은 집행 의무가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아직 시간은 있다. 16일로 예정된 본회의 전까지 서울시와 시의회가 타협을 이뤄내야 한다. ‘2010년의 혼돈’이 재현돼선 곤란하다. 당시 시의회는 무상급식 등 ‘부동의’ 예산을 통과시켰고, 서울시가 이를 거부하면서 준예산 직전까지 갔다. 그때보다 현재 상황이 더 안 좋다. 예산안 처리가 늦어져 초유의 준예산 사태가 벌어진다면, 코로나19 민생 지원에도 차질이 생긴다. 그런 민폐의 역사는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