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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가발, 여공 살던 ‘벌집’…디지털에 담은 구로공단 60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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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 G밸리산업박물관을 찾은 한 관람객이 구로공단의 역사가 기록된 동영상을 관람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G밸리산업박물관을 찾은 한 관람객이 구로공단의 역사가 기록된 동영상을 관람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토요일인 지난달 20일 오후 2시.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앞에 20대 초반 여성, 60대 남성 등 열댓 명이 모였다. ‘도시해설사와 함께 걷는 G밸리 투어’ 프로그램 참가자들이다. G밸리는 1960~80년대 전자·섬유공장이 ‘수출 한국’을 이끌던 구로·금천구 일대를 가리킨다. 과거 ‘구로공단’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던 이 수출산업단지는 2000년 12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바뀌었고 현재는 G밸리로 불린다.

SNS를 통해 프로그램에 신청한 이들은 두 시간 동안 전문가 설명을 들으며 BYC-써니전기-새마을연수원-대한광학-수출의 여인상 등 15곳을 탐방하고 G밸리산업박물관(MUSEUM G)을 둘러봤다. 참가자들은 “그 어느 문화유산 투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색다르고 유익했다”고 했다.

과거 구로공단에서 생산된 인형들과 검품을 위해 사용된 기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과거 구로공단에서 생산된 인형들과 검품을 위해 사용된 기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G밸리산업박물관은 내년 정식 개관을 앞두고 지난달 11일부터 관람객을 맞고 있다. 구로공단에서 G밸리까지, 60년 구로공단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가 설립한 국내 최초의 산업박물관이다. 이젠 IT관련 기업 집약지로 변모했지만, 인형과 가발, 전화기와 텔레비전을 생산하던 옛 공단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은 이곳을 지난 7일 찾았다.

박물관이 자리한 곳은 39층 규모의 G타워 3층.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를 실감 나게 재구성한 영상이 먼저 관객을 맞는다. 수많은 기업과 공단 근로자들이 허허벌판에 수출증진의 꿈을 위해 뿌리를 내린 구로공단의 시작점인 박람회역은 현재 지하철 1·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의 기틀이 됐다.

연례기획전 ‘구로, 청춘’의 첫 번째 이야기 ‘내 일처럼’에서 선보이고 있는 임흥순 작가의 영상 작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례기획전 ‘구로, 청춘’의 첫 번째 이야기 ‘내 일처럼’에서 선보이고 있는 임흥순 작가의 영상 작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또 다른 전시장엔 인형과 가발, 금성사 라디오와 대한전선 텔레비전, 모피공장(태림모피)에서 사용하던 낡은 미싱 등이 있다. 과거 공단 입주기업들이 박물관에 기증한 산업 유물들이다. 유물 수집을 담당한 홍명화 학예연구사는 “구로공단은 60~70년대 봉제산업부터 가발제조, 80년대 전자제품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서 순식간에 디지털 산업 공간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며 “이 산업의 역사를 ‘기업’과 ‘노동’이라는 두 중심축으로 압축했다”고 말했다.

1960~80년대 지방에서 상경한 여공들이 거주했던 생활 공간 ‘벌집(쪽방)’을 소개한 자료 영상도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한다. 당시 여공들은 가리봉동에서 3~4명이 두 평 남짓 방 한 칸을 빌려 썼고, 이 작은 방 20~30여 개가 밀집한 곳을 ‘벌집’이라 불렀다. 윤인향 학예연구사는 “영상으로 구로공단의 역사이자 이곳을 일군 사람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진짜 볼거리는 미디어 라이브러리에 있다. 구로공단의 역사를 디지털 영상으로 풀어낸 디지털 수장고와 G밸리 익스플로러가 박물관 역할을 다 한다고 할 정도다. 디지털 수장고 스크린에선 공단의 대표적 산업유산을 3D 이미지로 둘러보며 자료를 검색할 수 있고, 익스플로러 터치스크린에선 7000건이 넘는 구로공단 관련 사진과 박물관 소장품 정보, 300건의 구술 아카이브, 건축자산 기록물 등을 탐험할 수 있다. 공단 근로자의 구술 인터뷰부터 각종 사진, 심지어 행정문서까지 생생한 역사를 담은 ‘타임캡슐’인 셈이다.

구로공단의 산업유물로 전시된 옛 다이얼식 전화기. [사진 G밸리산업박물관]

구로공단의 산업유물로 전시된 옛 다이얼식 전화기. [사진 G밸리산업박물관]

G밸리산업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산업박물관이자 서울 서남권 첫 공공박물관이다. 독립적인 공간으로 설립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런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조사·연구, 그리고 디지털 아카이빙에 특히 중점을 뒀다. 축적한 디지털 자료를 관람객에게 어떠한 이야기로 효과를 극대화해 풀어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옛 구로공단 입주기업에서 생산한 못난이 인형 삼형제. [사진 G밸리산업박물관]

옛 구로공단 입주기업에서 생산한 못난이 인형 삼형제. [사진 G밸리산업박물관]

현재 박물관에선 G밸리 청년의 일과 삶을 담아낸 연례기획전 ‘구로, 청춘’의 첫 번째 이야기로 ‘내 일처럼’ (내년 2월 28일까지)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 작가를 비롯해 박한결, 우한나, 정만영 등 4인의 시각예술가가 박물관이 수집하고 소장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상과 설치물 등을 선보이고 있다.

이슬찬 학예연구사는 “내년엔 청소년과 직장인을 대상으로 교육과 G밸리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열 계획”이라며 “12월 중 방문이 어려운 관람객을 대상으로 랜선투어와 비대면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고 말했다.

황보연 서울시 경제정책실장은 “G밸리산업박물관은 우리 산업발전사를 압축해 보존하는 역사박물관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내년 공식 개관하면 미래 세대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새로운 기회를 경험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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