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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북한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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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경제학부 교수

1996년 6월의 러시아 대선을 앞두고 미국은 패닉 분위기였다. 공산당 후보인 겐나디 주가노프가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을 꺾고 당선될 가능성이 커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사회주의로 회귀하고 국제질서는 다시 냉전으로 돌아갈 것이 우려됐다. 사실 모든 지표에 따르면 주가노프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소련 해체 후 1995년까지 러시아의 국민소득은 40%나 줄었다. 소득 불평등은 현저히 악화돼 소련 말기 북유럽 수준이었던 지니계수는 1990년대 중반 남미 수준으로 급등했다. 더욱이 공산당은 대선 1년 전에 열렸던 총선에서 압도적인 제1당이 되었다. 상당수 미국 지식인들은 역사적 종언을 고했다던 사회주의가 러시아에서 재탄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 공산당, 시장의 힘에 패배
북한에서도 시장이 대세가 되어
사회주의 가치관 허무는 동시에
개인주의, 사유 의식 키우고 있어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바로 시장이 몰고 온 밑바닥 혁명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의 현지 연구가 끝나갈 무렵, 필자는 아들에게 선물할 러시아제 장난감을 찾아다녔다. 여러 곳을 허탕 치고 들른 곳이 ‘젯스키 미르’라는 아동용품 백화점이었다. 그런데 이 백화점은 한 층만 제외하고 모두 텅 비어 있었다. 그 층의 중간엔 거대한 유리 곽 안에 값진 제품이 전시된 듯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틈을 헤집고 가까이 가 보니 허탈하게도 남녀 아동용 수입 신발 1켤레씩이었다. 그러나 평생 본 적이 없는 채색 신발의 아름다움에 러시아 부모들의 강렬한 눈빛이 내려꽂혔다. 그곳은 단지 제품 전시장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충성을 맹세하는 공간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저렇게 예쁜 신발을 사주고야 말겠다는 결단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러시아인 마음 깊이 사회주의는 완전히, 불가역적으로 해체되고 있었다. 결국 옐친은 주가노프를 꺾고 러시아 2대 대통령이 되었다.

북한 주민은 70% 이상의 소득을 시장에서 벌고 식량과 소비재의 60% 이상을 시장에서 구입한다. 시장은 부유해질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돈을 벌 욕구를 유발한다. 시장이 커지고 새로운 물건이 등장하면 돈을 벌어야 할 이유와 동기도 더 강해진다. 그럴수록 돈을 벌고 쓸 자유를 주는 체제를 지지하게 된다. 이처럼 소비 욕구와 시장 활동은 상승작용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이는 정치와 사회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대다수 북한 주민은 겉으론 사회주의자이지만 마음으로는 자본주의에 충성하고 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은 탈북 후 남한 정착까지 1년이 지나지 않은 탈북민을 해마다 설문조사하고 있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자본주의를 지지한다는 응답자는 68%인 반면 사회주의 지지자는 16%에 불과했다.

사회주의 가치관은 시장을 만나면 바람 빠진 풍선이 된다. 서울대의 이정민, 최승주 교수와 필자, 그리고 컬럼비아대의 이석배 교수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탈북민은 남한 출신 주민보다 훨씬 평등 지향적이지만 유독 그렇지 않은 그룹이 있다. 바로 북한에 거주할 때 시장 활동을 했던 탈북민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모은 돈을 나눠 갖게 하는 경제학 실험에서 남한 출신 주민처럼 자기 몫을 확실히 챙겼다. 시장 활동이 집단주의 가치관을 부식하고 개인주의와 사적 소유의식을 키운다는 뜻이다. 동시에 시장은 인간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결과가 성공적이면 부자가 되지만 실패하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시장은 이처럼 수동적 인간을 능동적 주체로 변모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근본을 허물고 있다.

시장 혁명의 원조는 중세가 근대로 이행할 때의 상업혁명이었다. 당시 학자들은 상업의 발달이 가져올 미래 사회에 관해선 논쟁을 벌였지만 기존 질서가 해체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특히 몽테스키외와 애덤 스미스는 상업이 초래하는 정신과 사회의 변화에 주목했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상업은 지식을 침투시켜 구성원 간 소통을 촉진하며 사회에 분별과 질서라는 ‘온화한 습속’을 낳는다. 애덤 스미스도 상업은 절제의 덕을 키우며 독립심을 고양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유럽에서 상업이 발달한 정도와 국민의 도덕심이 비례한다는 점을 들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기에 시작됐던 북한 시장화는 김정은의 시장 통제로 두 번째 위기에 직면했다. 첫 번째 위기는 김정일이 시장억압 정책을 펼 때였다. 그러나 2009년 화폐개혁으로 정점에 이르렀던 이 정책의 결과 시장이 대승했고 김정일은 대패했다. 이 때문인지 김정은은 처음엔 시장을 억압하지 않고 이용하려 했지만 2019년 이후부터는 시장 통제로 돌아섰다. 하노이 회담 결과와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은 전략적 후퇴인지, 아니면 시장화가 초래하는 변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사회주의로 돌아가려는 시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후자는 실패한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2000만 명을 희생하면서 시장사회주의를 뒤엎고 사회주의로 복귀했지만 지금 김정은에겐 그럴 힘이 없다. 김정은이 아니라 시장이 북한의 대세다. 그도 이 조용한 혁명의 한 행위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