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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경복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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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판타스틱” “뷰티플” “언빌리버블”

TV 재연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2년 전쯤 하버드 경영대학원생들을 ‘접대’해야 했던 기자는 시차 적응도 하지 못한 그들을 경복궁으로 안내했다. 심드렁해 하던 학생들은 궁궐 곳곳을 둘러보는 사이 점점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고 답사 마무리 즈음에는 완전히 매료된 듯했다. 탄성이 터져 나온 건 마지막으로 찾은 경회루에서였다. 홀연히 등장한 연못과 누각은 경복궁 관람의 화룡점정이었다. 하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경복궁은 감탄사를 자아낼만한 곳이 아니었다. 만신창이가 된 일본강점기 모습 그대로라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法宮)이지만 여러 차례 버림받은 비운의 궁궐이기도 하다. 1395년 새 수도 한양에 지어진 이 궁은 불과 3년 뒤 2대 임금 정종의 개경 환도로 인해 첫 번째 버림을 받는다. 뒤이은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형제들을 살육했던 그 궁이 꺼림칙했다. 그는 창덕궁을 짓고 이어(移御) 하면서 다시 경복궁을 버렸다. 임진왜란 때는 왕과 백성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았다. 왕은 몰래 궁을 빠져나와 몽진했고, 버림받은 백성은 버림받은 경복궁을 불태우는 것으로 한풀이했다.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 주도의 대대적 복구가 이뤄지면서 300년 가까이 폐허였던 그 공간에  500여동 규모의 대궐이 복원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자리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을 세웠고 이후에도 속속 건물들을 헐어냈다. 36동만으로 간신히 명줄을 이어가던 경복궁은 광복 이후에도 먹고 살기 바빴던 대한민국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복원이 시작된 건 광복 50주년을 목전에 둔 1991년이었다. 강녕전과 교태전을 시작으로 진행된 복원 작업은 광화문·동궁·흥례문·태원전·건청궁·소주방 등의 재건으로 이어졌고, 궁궐은 제법 장대한 외양을 갖추게 됐다. 복원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1일 ‘고궁연화’(古宮年華)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막했다. 내년 2월 27일까지 열리는 이 특별전을 찾아 지난 30년의 역사(役事)를 되짚어 보는 것도 뜻깊을 듯하다. 얼마 전 새 단장을 마치고 재개방한 향원정까지 함께 둘러본다면 금상첨화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