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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20년 숙성인데 맛이 왜 이래?”늙은 위스키의 변명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47)

웬 중년의 안경 쓴 남자가 사다리 위에 올라 앉아있는 사진. 사다리가 너무 높아 머리가 천장에 닿아 있다. 몸을 대각으로 틀지 않으면 천장을 뚫고 나갈 기세라 몸을 튼 채 불편하게 쭈그리고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옷이라도 편하게 입었으면 나았을 텐데 양복에 셔츠에 넥타이에 구두까지. 남자는 왜 이런 꼴로 위험하게 사다리 위에 쭈그리고 앉아있을까?

'피터의 법칙 : 왜 항상 일이 잘못되는가'의 작가 로렌스 J. 피터, 1969. [사진 김대영]

'피터의 법칙 : 왜 항상 일이 잘못되는가'의 작가 로렌스 J. 피터, 1969. [사진 김대영]

이 그림 속 인물은 ‘피터의 법칙’을 만든 로렌스 J. 피터다. 피터의 법칙이란 수직적 계층 조직에서 직무수행 능력이 부족한 직원이 조직 내 고위직을 차지한다는 법칙이다.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 능력을 입증하며 계속 승진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가 성과를 못 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률적인 승진 제도를 벗어나 개인의 직무 장점을 살려주고, 직무에 맞는 보수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승진으로 직원의 능력을 과시하는 조직문화에서 벗어나 수평적, 개방적 조직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높은 사다리 위 남자가 불편해 보이는 건 피터의 법칙 때문이다.

위스키 증류소 숙성창고에서 세월을 보내는 오크통이 이런 직원이라면 피터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10년간 오크통에서 숙성된 위스키가 맛있다고 해서 20년 숙성했을 때 맛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오크통 별로 최적의 숙성 기간이 있다. 얼마 전 만난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 관계자는 “주기적으로 오크통에서 위스키 샘플을 채취해 시음하면, 몇 년 정도 숙성했을 때 최적의 맛을 내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숙성 중인 오크통. [사진 김대영]

숙성 중인 오크통. [사진 김대영]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오크통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숙성창고에서 하릴없이 세월만 보내는 위스키도 있다. 종종 이런 위스키가 병입돼 판매되는데, ‘조금만 일찍 병입했다면’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태운 오크통 쓴맛이 너무 강해 다른 향을 잡아먹거나, 애써 붙잡고 있던 향미를 잃어버린 경우다. 위스키 제품화를 결정하는 마스터블렌더도 사람이기에, 과거의 맛으로 미래를 점치다 실패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피터의 법칙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위스키는 주류 매장의 악성 재고로 남아 먼지만 쌓여간다.

비단 기업이나 위스키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다. 30대까지 잘살아왔다고 40대를 잘살 거라 보장할 수 없고, 혼자서 잘 살았다고 결혼해 잘 살지 아무도 모른다. 또 평생 열심히 운동했다고 나이 들어서 건강할 거라 예단할 수 없다. 과거의 성과가 미래를 정해주지 않는다. 물론, 피터의 법칙도 완벽하진 않다.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잘 살 수 있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릴 수도, 건강한 노년을 보낼 수도 있다.

오크통에서 숙성한 한 잔의 위스키. [사진 김대영]

오크통에서 숙성한 한 잔의 위스키. [사진 김대영]

중요한 건 과거의 성과가 나를 배신했을 때에도 무너지지 않고 또 그다음을 준비하는 자세가 아닐까. 로렌스 박사가 천장에 머리를 비뚜로 한 채 찡그렸던 모습을 떠올리며, 과감하게 사다리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 과거의 성과가 미래의 성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성과를 냈던 사람임을 기억하고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세월이 야속한 늙은 위스키도 새로운 오크통으로 갈아타면 새 생명을 얻는다. 새로운 조직,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오크통엔 늘 기회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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