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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픽션 ‘지옥’과 현실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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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드라마 ‘지옥’을 지난 주말 정주행했다. 끔찍한 죽음을 부르는 지옥행 사자, 혼란을 “신의 뜻”이라며 공포 마케팅을 벌이고 세를 키우는 사이비 종교단체 ‘새진리회’, 무고한 피해자 보호와 실체 규명에 힘쓰는 사람들. 흡입력 있는 이야기에 시리즈를 보는 여섯 시간이 ‘순삭’ 하듯 지나갔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리 없는 초자연적 픽션이라고 넘겨버리기엔 가볍지 않은 울림도 있었다. 새진리회 초대 교주 정진수 역을 맡은 배우 유아인은 며칠 전 인터뷰에서 “‘지옥’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집단의 광기·혐오·폭력은 현실에서도 지속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검증 안 된 정보를 맹신하고 그걸 무기 삼아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현상들 역시 쉽게 볼 수 있어요.”

드라마 속 집단 광기·혐오·폭력
배우 말처럼 현실도 다르지 않아
‘이재명 홍보’ 의원 서열화 논란
다름 존중않는 도그마 되레 손해

선(善)과 진리를 독점했다고 믿는 소수와 이들을 맹신하는 세력이 가하는 폭력의 정당화는 역사 속에 비일비재하다. 중세 종교 성역화 과정에서 희생양이 필요했던 이들의 집단 히스테리로 판명난 마녀사냥, 인종 혐오의 화신 히틀러와 조력자들이 빚어낸 나치의 광기, 중국에서 모택동과 공산당이 홍위병을 앞세워 벌인 폭압적 문화대혁명 등. 이렇게 피를 부른 광풍만큼은 아니어도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교조적·전체주의적 폭력성은 유아인의 말마따나 현실 세계에서도 곧잘 목격된다. 권력 쟁투가 가장 첨예하게 펼쳐지는 대선이라는 전장에서는 더 그렇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 대선후보 승리를 위한 『인간 이재명』 독후감 쓰기 캠페인이 벌어질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민주’ 없는 민주당의 낯 뜨거운 숭배정치”(정의당) 등 비판이 수긍이 되긴 했지만, 후보 제대로 알기 차원에서라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후 일련의 흐름은 ‘민주당이 민주 정당인가’라는 회의감을 품게 만든다. 이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을 여러 차례 비판해 온 이낙연 전 대표 캠프 출신의 이상이 제주대 교수가 지난달 말 당원 자격정지 8개월의 징계 처분을 받았다. 이 후보와 이 전 대표 열성 지지자들 간 공방이 벌어졌던 민주당 권리당원 게시판은 ‘당원 간 분쟁 과열’을 이유로 지난 1일부터 폐쇄됐다. 2019년 개설될 때만 해도 민주당이 “전자민주주의에 한 발짝 다가섰다”고 자랑했던 게시판이다. 논란 끝에 6일 ‘실명제 도입 후 내년 1월 재개’로 결론이 모아졌지만, 당내에서 이미 “반대 목소리에 재갈 물리는 건 퇴행적 정당의 독재적 모습”이란 성토가 쏟아지고 난 뒤다.

‘나는 꼼수다’ 출신 김용민 평화나무 이사장은 이 후보를 위한 SNS 홍보활동을 전수조사하고 그 순위를 페이스북에 공개해 줄 세우기 논란을 낳고 있다. 활동 우수 의원 21명을 꼽았고 하위 의원 80명의 실명도 쭉 나열했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이 “김용민씨 스스로를 권력화하고 민주당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하자 “선거운동 가뜩이나 하기 싫은데 더 안 하게 만든다? 그럼 탈당해야지”라고 되받았다. 정작 박 의원은 우수 의원 21명에 들어 있었다.

김 이사장은 자신을 “국회의원들 일 좀 하라는 힘 없는 정치 나부랭이”라고 했지만 “싫으면 탈당해야지”라는 말은 완장 두른 이의 으름장처럼 들린다. 김 이사장의 페이스북에는 박 의원을 비방하는 동조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생각이 다른 이를 겨냥한 좌표찍기, 뒤이은 문자폭탄 등 집단적 공격은 익숙한 전개다.

이견을 불허하는 민주당 일부 세력의 공격적 배타성은 도리어 이 후보에게 득보다 실이 될 것 같다. 그가 조국 사태를 연이어 사과하며 ‘조국의 강’을 건너려는 건 중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아닌가. 가령 201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가 무엇이 부족했는가를 성찰하며 쓴 책 『1219 끝이 시작이다』에 나오는 이런 대목도 비슷한 맥락일 거다. “혹시 우리가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선을 그어 편을 가르거나 우월감을 갖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드라마 ‘지옥’ 결말에서 한 택시 기사가 던진 말은 연상호 감독의 주제의식을 함축하는 듯하다. “저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겁니다”라는 대사. 독선과 아집이 도그마로 이어지는 현실 정치에 대입시킨다면 이런 메시지로 변주될 수 있을까. “정치(또는 이념)는 잘 모르고 관심 없지만 확실한 건 정치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