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ㆍ필리핀 등지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이 ‘고액 아르바이트(알바)’를 미끼로 대학생이나 주부 등을 속여 현금을 운반시키는 사례가 급증한다. 특히 알바몬이나 알바천국 같은 사이트를 통해 알바인 줄 알고 돈 심부름 업무를 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실형을 선고받고 전과자로 전락하는 일이 속출한다.
이들이 “보이스피싱인 줄 몰랐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한다는 기사가 나가자 “알면서 한 거”(네이버)라며 비난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그런데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이 얼마나 감쪽같이 속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드러났다. 보이스피싱을 의심해 경찰 관서로 찾아간 피해자가 경찰관에게 전화를 바꿔줬으나, 보이스피싱범은 경찰까지 속여 결국 돈을 가로챈 것이다.
알바생들이 택배ㆍ대출 업무라고 접근한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감쪽같이 속았다고 호소한다는 기사가 보도된 뒤 이들을 나무라는 주장이 잇따랐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는 ‘아니 요즘같이 국내송금 해외송금 간단한 세상에 남의 돈 현금으로 받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는거 이상하다는 생각 못해봤나?’ ‘모르긴 뭘 몰라 알면서 하는 거지’ 등 댓글이 이어졌다.
다음도 비슷했다. ‘모를수가 있나? 대략 알면서 묵인하고 동조한 거지’ ‘자기가 뭘 하는지 몰랐다는게 말이 되나?’ 등 질타가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 눈에 띄는 댓글이 네이버에 등장했다.
‘이건 경찰의 무능함도 책임 있다. 왜냐고? 이상한 구인 내용이 있길래 경찰에 신고했었다. 채권추심인데 현금을 받아오라더라.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방법이라 신고했었다. 움직이지도 않더라. 내가 물어봤었다. 이거 보이스피싱 같은 건데 해도 되나요? 말리지도 않고 스스로 판단하라더라. 내가 경찰이었다면 같이 움직여서 속을 뻔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구제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댓글의 진위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 경찰에 도움을 청했으나 보이스피싱범이 경찰까지 속여 넘긴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얼마 전 유죄 판결을 받은 L씨는 중국에서 중국인 총책이 이끄는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에서 검사를 사칭해 한국에 있는 피해자들의 돈을 빼앗는 범죄를 장기간 저질렀다. 그런데 L씨는 지난해 부산경찰청 조사에서 자신이 경찰관까지 속인 사실을 털어놨다.
경기도의 한 여성을 상대로 "당신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사용됐다"며 겁을 줘 약 600만원을 송금하도록 했다. 한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 여성이 L씨가 진짜 검사인지 확인하겠다며 전화가 연결된 상태에서 인근 지구대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곤 근무 중이던 경찰관에게 전화를 바꿔줬다.
L씨는 경찰관에게 천연덕스럽게 "서울중앙지검 홍00 검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연락처를 물어봤다고 한다. L씨는 범죄 조직에서 사용하는 번호를 말했다. 그러자 무사 통과했다는 것이다. 결국 L씨 조직은 여성의 돈을 무사히 빼갔다.
보이스피싱범들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상대방을 속이는지 확인된 셈이다. 범죄 흐름에 밝은 경찰관까지 속아 넘어갈 정도면 대학생이나 주부 등을 훨씬 쉽게 속일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 여성은 경찰관에게 가기 전에 이미 송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보이스피싱범은 전화를 끊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경찰관과 통화를 한 것일까.
L씨는 은행의 지연 인출 제도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보이스피싱 등을 우려해 송금한 돈을 현금으로 찾을 때 일정 시간 동안 인출이 안 되도록 한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송금한 돈을 100만원 이상 찾으려 하면 30분 동안은 인출이 안 된다”며 “과거엔 10분 정도였는데 보이스피싱 범죄가 잦아 30분으로 늘렸다”고 설명했다.
보이스피싱범들은 피해자가 송금 후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보이스피싱인 사실을 알아채고 계좌의 지급을 막으면 범행이 수포가 된다는 점을 감안해 송금 후에도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L씨의 경우 피해자가 경찰관에게 신고한 사례가 한 번 더 있었으나 이 땐 경찰관을 속이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송금은 한 상태였으나 30분 이전에 계좌를 막아 돈을 빼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L씨의 사례는 중국의 보이스피싱 조직이 한국 경찰관까지 속여 넘길 정도로 수법이 날로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금 운반 알바의 경우 검거되면 알바가 범죄인 줄 알았는지가 쟁점이 된다. "정말로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은 것"이라고 하소연해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나 법원에서는 가끔 알바생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나온다. 지난 4월 인천지법은 검찰이 ^면접을 거치지 않았고 ^회사 소재지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처벌을 요구한 현금수거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현금수거책 가운데도 전과가 있거나 보이스피싱인 줄 알면서 범행에 가담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 중엔 아예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에 들어가 검찰 수사관이나 검사 사칭을 하며 본격 범행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창무 중앙대 보안대학원장은 "보이스피싱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외국에 있는 주범들을 잡을 수 있도록 국제 업무에 인력을 늘리는 등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며 "특히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아서 가담하게 된 사람들이 과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재판 과정에서 고의 여부를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주안 기자 joo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