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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우리는 종교의 껍질을 믿는가, 알맹이를 믿는가

중앙일보

입력 2021.12.04 05:00

[백성호의 예수뎐]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목숨과 같은 것이었다.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은 십계명에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라는 계명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언약의 종교’ ‘계약의 종교’다. 유대인은 신이 준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약속을 하고, 그 약속에 대한 답으로 신은 유대인에게 구원을 준다. 유대인의 상식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건 구원과 직결된 문제였다.

만약 안식일을 어기면 어찌 됐을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 실제 구약의 출애굽기에는 “이날을 거룩히 지켜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35장 2절)라고 기록돼 있다. 안식일을 어길 경우 ‘죽으리라’라고 명시돼 있다. 가톨릭 성경에는 “이날 일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기 35장 2절)라고 번역돼 있다.

십계명 중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은 유대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심지어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율법까지 있었다.

십계명 중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은 유대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심지어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율법까지 있었다.

(29) 예수는 왜 유대인이 목숨처럼 여기는 계명을 어겼나

실제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에 일을 하는 건 사형감이었다. 돌로 쳐 죽여야 할 일이며 유대 사회에서 도려내야 할 대상이었다. 출애굽기에는 “이날에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제 백성 가운데에서 잘려나갈 것이다”(31장 14절)라고 못 박고 있다.

예수는 그 계명을 어겼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다가 등이 굽은 여자를 고쳐주었다. 안식일에 일을 한 셈이다. 유대인의 상식에는 신이 준 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 광경을 본 회당장은 분노했다. 회당장은 군중을 향해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누가복음 13장 14절)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받아쳤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누가복음 13장 15~16절) 그랬으니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도려내야 할 대상’으로 봤을 터이다.

율법주의적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율법주의적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예수는 파격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아예 회당에 와서 기다렸다. 그들은 예수를 ‘사형감’이라고 생각하여 고발할 속셈이었다. 그날 예수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쳤다. 안식일에 눈먼 사람을 낫게 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수에게 따졌을 터이다.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왜 하느님과의 언약을 무시하느냐고 말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가복음 3장 4절)

예수의 목표는 달랐다.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을 놓고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따지고 있을 때 예수는 전혀 다른 곳을 찔렀다. 사람을 살리느냐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두느냐. 예수의 관심사는 그것이었다. 심지어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유대의 율법주의를 겨누었다. 그 질문은 그 자체로 파격이자 도발이자 혁명이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는 지금도 정통파 유대인 마을이 있다. 귀밑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유대인들을 쉽게 만나는 곳이다. 나는 그 마을의 골목을 걸었다. 어린아이들이 자주 보였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많이 낳는다. 구약의 창세기에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1장 28절)라는 대목을 믿는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통곡의 벽은 중요한 장소다. 조상들의 영광을 되짚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통곡의 벽은 중요한 장소다. 조상들의 영광을 되짚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녀를 여럿 두는 걸 신의 축복으로 여겼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여자아이가 서너 살쯤 된 동생을 안고 다니는 풍경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나 볼 법한 광경을 유대인 마을에서는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성경은 철저한 ‘삶의 지침서’다.

안식일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과 유대인의 눈은 달랐다. 예수는 안식일을 어찌 봤을까. 안식일의 ‘안식’을 예수는 어떤 의미로 설했을까. 마태복음에 이에 대한 답을 주는 일화가 있다. 예수가 직접 안식을 거론한 대목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11장 28~29절)

예수는 두 차례나 안식을 강조했다. ‘안식’은 그리스어로 ‘아나파우소(anapauso)’다. 영어로는 ‘give you rest(안식을 주다)’이다. 무슨 뜻일까. 그저 휴식을 주고 여유를 주는 것일까. 예수가 설한 ‘아나파우소’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어떠할 때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될까.

갈릴리 호수 주위에는 초원이 펼쳐져 있다. 예수는 그리스어로 '아나파우소'인 안식의 본질적 의미를 강조했다.

갈릴리 호수 주위에는 초원이 펼쳐져 있다. 예수는 그리스어로 '아나파우소'인 안식의 본질적 의미를 강조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적인 위탁(Total commitment)’ 혹은 ‘전적인 항복(Total surrender)’이다.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다. 그게 ‘전적인 항복’이다.

그렇게 전적으로 내맡길 때 ‘아버지의 뜻’이 드러난다. 모든 걸 맡기면 ‘내 뜻’이 사라진다. ‘내 뜻’까지 맡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오로지 ‘아버지의 뜻’만 남는다. 예수는 신을 향해 그렇게 항복하라고 말한다. 그게 단지 항복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전적인 항복 뒤에 밀려올 무언가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늘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모른다. 그때마다 마음이 출렁인다. 그 갈림길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모든 걸 내맡기면 어찌 될까.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의 배를 흔들던 그 모든 파도가 잠이 든다. 왜 그럴까. 두려움이 포맷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포맷된 자리로 무언가 밀려온다. 그게 뭘까. 그렇다. 평화다. 그것이 ‘아나파우소(안식)’이다.

예수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본질적인 안식이 무엇을 통해서 밀려오는 가를 예수는 깊이 꿰뚫고 있었다.

예수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본질적인 안식이 무엇을 통해서 밀려오는 가를 예수는 깊이 꿰뚫고 있었다.

내 뜻을 따를 때는 맛볼 수 없는 평화, 아버지 뜻을 따를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평화. 우리의 삶을 온유하게 적시는 본질적 평화다. 예수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이라고 보았다.

짧은 생각
유대교는 선교를 따로 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을 향해 하느님을 믿으라고,
구약을 믿으라고,
신이 주신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유대교는 하느님이 오직 유대민족에게만
구원을 약속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계명입니다.
따라서 계명을 지킬 때 이루어지는 구원도
오직 유대인에게만 해당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배타적인 종교입니다.
외국으로 선교사를 보내지도 않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유대교를 믿으라고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도 않습니다.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믿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을 담은 신약성경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성경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이블(Bible)’입니다.
원래부터 ‘바이블’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생겨난 그리스도교가
‘신약’이란 것을 만들면서,
유대인의 바이블을 ‘구약’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오히려 불만입니다.

유대인은 예부터 내려오는 ‘바이블’을
지금도 그냥 ‘바이블’로 지키고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2000년 전 유대인의 눈에는
예수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종교적인 이유로 상종도 하지 않는,
변방의 사마리아인 여인에게
예수는 우물가에서 말까지 걸었습니다.

모세 5경만 믿던 사마리아인을
당시 유대인은 일종의 ‘오랑캐’이자 이방인으로 간주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유대인이 목숨처럼 여기는 안식일에 대해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며
도발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예수의 눈’을 봅니다.

예수는 유대인을 보기 전에 사람을 먼저 봤고,
계명과 율법을 따지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봤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메시지에는
하늘의 뜻이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율법과 격식과 제도에 가려서
점점 잊혀져 가는 하늘의 뜻을
예수는 몸소 되살려 냈습니다.

‘종교의 껍질’을 믿던 당시 유대인에게
‘종교의 알맹이’를 설파하던 예수는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껍질만 알지,
알맹이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종교의 껍질을 믿는 이들이
종교의 알맹이를 말하는 이를 처형했습니다.

비단 2000년 전의 일만이 아닙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종교의 껍질에 집착하는 이들이
종교의 알맹이를 말하는 이를 비난하는 광경을
요즘도 간혹 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묻습니다.

“너희는 종교의 껍질을 믿는가, 아니면 알맹이를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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