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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 曰] ‘생각 없는 생각’ 찾는 ‘반가사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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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호 34면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사유의 방’ 전시는 요즘 같은 겨울의 송년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듯하다. 지난 주말 방문했을 땐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한산했다. 덜 붐빈 덕분에 조용히 ‘사유의 의미’를 사유해볼 수 있었다.

이 전시의 한국어 제목은 ‘사유의 방’인데, 입구에 세운 안내문의 영어 표현을 보니 ‘A Room of Quiet Contemplation’이라고 적혀 있다. ‘조용히 명상하는 방’이라고 풀 수 있겠다. 사유와 명상은 어떤 관계일까? 사유는 어떤 생각을 거듭하는 것일 수 있고, 명상은 그런 생각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에 가까운데, 언뜻 반대로 보이는 이 두 단어가 같은 공간을 안내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시대 조각에 담긴 ‘사유’의 역설
근육질의 로댕 작품과 비교되는 ‘무아’

전시장 안에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2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사유의 방’이란 제목은 반가사유상의 ‘사유’를 그대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영어 안내문은 이를 ‘명상(Contemplation)’으로 풀이한 것이다. ‘사유의 방’이란 전시에 명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영어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반가사유상은 대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불리어 왔다. 작품의 재질인 ‘금동’을 맨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반가사유의 주어인 ‘미륵보살’은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다. 반가사유는 불교적 사유, 즉 깨달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전시의 공간 처리는 돋보였다. 소극장 규모의 공간 중앙에 다른 유물은 전혀 없고 반가사유상만 배치했다. 탑돌이 하듯 돌아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유의 의미다. 반가사유의 깨달음은 어떻게 사유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거론되기도 한다. 철학자 고(故) 김형효 교수는 근육의 유무로 두 작품을 비교한 적이 있다. 근육은 자아(自我)의식을 상징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육안으로도 근육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자의식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반가사유상’에는 조그만 근육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의식의 의지가 무화(無化) 혹은 무아(無我) 상태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나만 더 가지려는 생각, 나만 다 옳다는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이 무아적 사유의 출발이고, 반가사유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유를 내려놓는 사유라는 점에서 반가사유는 ‘사유 없는 사유’라는 역설적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유의 역설’을 알아차린다면 자세는 어떤 자세여도 괜찮을 것이다. 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다리에 엇갈리게 얹는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든, 한쪽 다리만 얹는 반가부좌이든 자세가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앉아서만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도 좋고, 서서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누워서도 할 수 있다. 특히 내년 대선을 준비하는 우리 정치인들이 이 ‘역설적 사유’의 의미를 음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의 ‘멍때리기(Hitting mung) 현상’을 보도했다. 코로나 펜데믹과 부동산 가격 폭등, 급속히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이 조용한 카페 같은 피난처를 찾아 힐링한다는 기사였는데, 이번 반가사유상 전시까지 함께 소개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WP 기사에서 멍때리기는 일종의 명상으로 소개되는 것 같다.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보인다. 필자 역시 명상과 멍때리기의 차이를 크게 부각하기보다는 그 공통점을 더 많이 존중하고 싶다. 그렇게 보면,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에서부터 오늘날 멍때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명상의 흐름은 유유히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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