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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미 추구한 백자, 단순·정직·편안함의 미학 빛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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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호 22면

한국 현대 도자의 대모 

창덕궁 옆 작업실 ‘김익영 도자예술’에서 만난 도예가 김익영. 깎은 감처럼 표면을 칼로 깎아내는 ‘면 깎기’ 기법에선 김익영 백자만의 힘과 조형성이 느껴진다. 신인섭 기자

창덕궁 옆 작업실 ‘김익영 도자예술’에서 만난 도예가 김익영. 깎은 감처럼 표면을 칼로 깎아내는 ‘면 깎기’ 기법에선 김익영 백자만의 힘과 조형성이 느껴진다. 신인섭 기자

2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 LVS에서 토전 김익영(86)의 개인전 ‘결(潔)’이 열린다. 조선 초 제기와 일상 기물 형태에서 영감을 얻고 ‘면 깎기’로 마감한 기(器), 합(盒), 반(盤) 등 현대 도자 40여 점이 전시되는 자리다.

김익영은 조선백자의 현대화를 이뤄낸 1세대 작가다. 그의 작품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미국의  시애틀 미술관과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등 전 세계 25개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도예가 리치 “조선백자 미학은 최고 경지”

서울대 화공과와 동 대학원 요업공학과에서 공부한 그는 홍익대 공예미술학과에 편입해 1년간 도자를 전공하고 미국 알프레드 요업대학원에서 유학한다. 그리고 이때 평생 천착하게 될 조선백자를 만난다. 영국의 유명 도예가 버나드 리치의 강의를 들으면서다. 1935년 서울 덕수궁에서 전시를 가졌던 버나드 리치는 영국으로 돌아갈 때 조선 달항아리를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평생 애지중지하던 그 달항아리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960년 오픈강좌 당시 버나드 리치는 70세가 넘은 나이였는데 전 세계에서 유학 온 도예작가 지망생들을 향해 ‘평생의 경험을 비추어 말하건대 조선백자의 미학이 오늘날 현대 도예가들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경지’라고 말했죠.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어요.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도자기’의 미학을 얘기할 때 늘 청자만 떠올릴 뿐, 일상의 그릇으로 익숙한 백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때였으니까요.”

굽과 몸통으로 구성된 백자 제기물확. [사진 갤러리 LVS]

굽과 몸통으로 구성된 백자 제기물확. [사진 갤러리 LVS]

섬광 같은 버나드 리치의 한 마디를 안고 61년 귀국한 김익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년간 학예연구관을 지내면서 조선백자를 본격 탐미한다. 그리고 63년 광주 무등산 분청사기 가마 발굴에 참여하면서 또 한 번 인생의 목표를 만나게 된다. 이 발굴에서 무더기로 쏟아진 제기(祭器)의 형태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내 생애 획기적인 은인을 만난 순간이었죠. 그때 제가 목격한 제기들은 모두 조형성이 완벽한 조각품들이었어요. 조선 초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청동제기가 유행했지만 너무 비쌌고, 그래서 조선 도공들이 흙으로 제기를 빚죠. 일정한 틀의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드는 것과 달리 손으로 일일이 형태를 빚는 과정은 아주 힘들죠. 본래 제기는 하늘에 바치기 위해 만들었으니 도공들의 마음가짐도 남달랐겠죠. 그래서 제기들은 모두 조형성이 뛰어나요.”

이후 김익영의 작품에서 몸통과 굽으로 나뉘는 제기의 형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또 이 과정에서 깎은 감처럼 부정형의 각이 표면에 드러나는 ‘면 깎기’ 방법도 고안해냈다.

“어떤 작품이든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고 형태를 잡진 않아요. 둥글게 물레를 돌리다 어떤 덩어리가 손에 잡히면 그걸 네모로 타원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방망이를 두들기죠. 불필요한 두께가 눈에 보이면 그걸 없애기 위해 칼로 깎아내는데 이때 자연스레 조형적인 각이 만들어지죠.”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평생 추구해온 백자의 궁극의 미학은 ‘조형미’라고 했다.

“나는 조선백자의 색에 연연하지 않아요. ‘백(白)색’을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죠. 설백(雪白)이 있고, 유백(乳白)이 있고, 회백(灰白)도 있거든요. 우리가 실제로 보는 백자의 색은 범위가 너무 넓어요. 그래서 나는 ‘조형과의 싸움’을 줄곧 해왔죠. 감히 ‘도자는 형태’라고 주장할 만큼 형태가 주는 아름다움·감흥·느낌을 쫓고 있어요. 달항아리·제기·반상기 등 조선백자가 가진 다양한 형태의 요소들을 다 흡수해서 나만의 것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이 커요.”

백자는 흙과 유약, 가마 온도에 따라 색감이 달라진다. 김익영은 화공과 출신답게 백토와 유약을 자유자재로 조합해 자신이 원하는 백색을 창조한다. 때로는 투명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차갑게. 그리고 오롯이 드러나는 맨몸의 도자에 ‘조형미’라는 옷을 입혀 저마다 다른 감흥과 아름다움이 빛나게 한다.

그는 조선백자 조형미의 미덕을 “단순함, 정직함, 편안함”이라고 정의했다. ‘단순함’이란 모든 것을 수용하고 응축한 결정판이라는 얘기다. 달항아리 작가로도 유명한 그는 백자의 단순함의 미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화공과 출신답게 백토·유약 자유자재 조합

백자 장수반.

백자 장수반.

“달항아리에는 조형적인 신비함이 있어요. 두 개의 반원을 위아래로 맞붙인 형태인데, 그 원 속에 무한한 변화가 있거든요.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갈 때는 원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허리 아래로는 직선으로 뚝 떨어지는 게 변화무쌍하죠. 그건 보는 사람마다 달라서 결국 안아봐야 그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는데, 모든 다양한 성격의 선을 다 끌어안고 있으니 그야말로 풍요로움 속의 단순함, 미니멀 아트의 정수라 할 수 있죠.”

‘정직함’은 어떤 재료든 그대로 받아들여서 순응하는 멋이다. ‘편안함’은 형태에 무리가 없어서 함께 있고 싶은 친근함을 말한다.  “내가 추구하는 목표는 누가 봐도 단순하고, 정직하고, 편안한 백자를 만드는 건데 이걸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에너지(힘)에요. 만든 이는 에너지를 전달하고, 받은 이는 그 힘 속에 숨은 쾌감과 즐거움을 느끼길 바라죠.”

전 세계 40명의 도예가를 소개한 책『대가의 도예(Masters: Porcelain)』의 편집자 수잔 J.E. 투리티요는 김익영의 작품을 두고 “건강하고 솔직담백한 정신을 불러오는 선명한 선, 백색의 표면 그리고 견실하고 단아한 형태는 매우 현대적이며 선과 형태, 굽과 손잡이, 뚜껑과 용기 사이의 아름다운 균형은 구성적 완벽함을 지닌 건축같다”고 평한 바 있다.

김익영은 86세인 지금도 매주 한 차례씩 가마에 불을 지피고 20~30여 점의 작품을 굽는다. “도자 작품은 순수하게 손안에서 만들어지죠. 그래서 작가라면 작품을 많이 만들어봐야 해요. 지금도 새 작품을 빚으면서 손으로 비례를 바꿔 가는 재미가 상당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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