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한’ 민요 만들고 개인전 열고…시골 노인들 “나도 예술가”

중앙선데이

입력 2021.12.04 00:20

업데이트 2021.12.0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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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호 16면

브라보! 마이 아트 라이프 

제주 해안동 마을예술학당 노인들이 직접 지은 노래 ‘해안빙떡’을 부르고 있다.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제주 해안동 마을예술학당 노인들이 직접 지은 노래 ‘해안빙떡’을 부르고 있다.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경북 예천 사는 70대 할매들이 가수로 데뷔했다. “(전략) 여자 목소리가 담장 넘으면 안 된다카네 / 난 아니라고 봐 / 암탉이 울면 계란을 낳아 잘 산다는데 / 난 된다고 봐 /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꼬 / 난 아니라고 봐 / 요즘엔 하늘값 보다 땅값이 더 비싼데 / 난 맞다고 봐”로 이어지는 노랫말이 요즘 JTBC 인기예능 ‘풍류대장’의 ‘조선팝’보다 힙하다.

지난 5월부터 어르신 15명과 예술가 4명이 매주 마을회관에서 만나 놀며 노래하는 ‘노세노세 캥마쿵쿵노세’ 프로그램에서 음원을 낸 것이다. 노인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마음 가는 대로 흥얼거리면 예술가들이 추임새를 넣고 편곡을 추가하는 식으로 함께 만든 노래다. 통명농요 전수자인 안성배 강사는 “마을 민요가 다 사라졌는데, 어른들의 어법으로 노래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녹음을 목표로 수업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제안해 녹음까지 하게 됐다”고 전했다.

‘해안자랑가’ 뮤직비디오.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해안자랑가’ 뮤직비디오.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제주 해안동 사람들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1930년대 서당 훈장이 지었다는 구전 시조 ‘해안자랑가’를 지역 예술가들이 노인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발굴해 합창곡으로 다듬었고, 마을 행사 때마다 애국가처럼 부르고 있다. 할머니들이 향토 음식 만드는 과정을 담은 ‘해안빙떡’이라는 곡도 지었다. 해안초등학교 앞 문화 공간 ‘상상창고 숨’에서 제주 문화를 주물러 ‘마을예술학당’을 꾸리고 있는 박진희 대표가 주도한 일이다.

미술을 전공하고 현장 활동가로 떠돌다 ‘번아웃’을 겪게 된 박 대표는 휴식을 위해 제주로 내려갔다.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 얻은 개인 작업실이 어느새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어우러지는 마을의 문화 사랑방으로 거듭났다. 그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찾아왔지만 노인들과 소통은 힘들었다. 4·3 사건 이후 마을 재건하느라 배움의 기회를 잃은 어르신들이 처음엔 연필도 못 잡으셨는데, 이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그림으로 쏟아내고 있다. 누군가 시집와서 새벽에 물 뜨러 다녔던 이야기를 꺼내면 너나없이 눈물바다가 되는데, 지금 그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경로당에서 시간만 보내던 노인들이 스스로 즐길거리를 찾은 게 가장 큰 변화란다.

해안동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손수 제작한 마을지도.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해안동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손수 제작한 마을지도.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런 활동들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2005년부터 협력해온 지역문화예술교육 기반구축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요즘 화두로 떠오른 ‘문화예술교육 지역분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국고-지방비 매칭으로 진행되던 일부 지원사업이 현 정부 국정목표인 지역분권화에 발맞춰 내년도 전면 지방이양을 앞두고 있는데, 2년 전부터 과도기를 갖고 지역 예술가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하도록 장려하면서 나타난 ‘힙한’ 성과들이다.

요컨대 동네 문화센터에 언제 어떤 수업을 개설할지까지 나라에서 정해주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 동네에서 춤을 출지 영화를 찍어볼지 유튜브 운영을 해볼지는 지역 예술가와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됐다. 주어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례비를 받던 예술가들이 직접 프로젝트를 기획해 예산을 따고, 주민들도 아이디어를 적극 제안해 능동적으로 활동을 꾸려가게 된 것이다.

제주 해안동 마을예술학당 할머니의 사진일기.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제주 해안동 마을예술학당 할머니의 사진일기.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광주 북구 양산동 사람들은 단체로 ‘크리에이터’로 거듭났다. ‘양산마을 미디어 기록단’ 10여명이 시장골목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힐링 콘텐트를 만들고 있다. 맥가이버 뺨치는 40년 경력의 시계방 사장님, 2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킨 이발사 등 동네 사람들의 스토리를 발굴한다. 쓰레기 처리나 주차 등 공공 생활 이슈도 다룬다.

마을예술학당의 어린이들.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마을예술학당의 어린이들.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10여년간 양산동에서 미디어 기록단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김혜일 문화공동체 아우름 대표는 ‘지역분권형 문화예술교육’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 지금은 스스로 “삶 속에서 시너지를 내왔다”고 자부하지만, 음악 프로그램 강사로 현장을 떠돌던 시절 초등학생 아들의 “아빠는 왜 우리하곤 노래 안 해?”라는 물음에 충격을 받은 것이 변화의 계기가 됐다.

“잠만 자러 갔던 우리 동네에서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애들 친구 가족을 모아 마을합창단부터 시작했죠. 마을에 머물다 보니 마을에 관심을 갖게 되더군요. 1년 사업 끝나면 떠나는 ‘보따리장수’가 프로그램에만 집중했다면, 삶의 현장에서는 사람·관계·공간 중심으로 기획을 하게 되니 더 책임감이 생기더군요.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이뤄지니 지속가능하고요. 실제로 합창단이 3~4년 됐을 때 일부러 지원금 신청을 안 했더니, 가족들이 자생적으로 만들어내더군요. 삶의 영역 안에 모일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광주 양산동 엄마꽃예술학교에서 화가로 거듭난 이순임씨.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광주 양산동 엄마꽃예술학교에서 화가로 거듭난 이순임씨. [사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문화예술교육이 여타의 평생교육과 다른 차별성이 바로 자발성이다. 김 대표가 운영하는 미술 프로그램 ‘엄마꽃 예술학교’의 이순임 할머니는 스스로 화가가 된 케이스. 처음엔 문해력도 없었지만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글을 깨치더니 개인전까지 열었다.

“누군가 ‘여긴 뭘 안 가르쳐 주네’라고 하니까 이순임씨가 명언을 남겼어요. ‘여기는 가르쳐주는 데가 아냐. 자기가 끄집어내는 데야’라고. 문화예술교육의 힘이 바로 그것이죠. 배우고 가르친다는 인식으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어요. 동네로 깊숙이 들어가 관계를 형성하는 게 핵심입니다.”

정부, 교육 강박 버리고 예술가적 상상력 간접 지원해야
임학순, 박진희, 김자현, 김혜일(왼쪽부터). 전민규 기자

임학순, 박진희, 김자현, 김혜일(왼쪽부터). 전민규 기자

지난 16년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이끌어온 문화예술교육이 큰 변화를 맞았다. 지원사업이 지방이양되면 현장에서는 사업이 지역특성에 따라 축소될 수 있다. 하지만 경직된 포맷으로 운영되던 사업이 유연해지고 자생적인 생태계 조성으로 이어질 기회기도 하다. 대 전환기에 현장에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 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현장 활동가인 김혜일(이하 김), 박진희(이하 박) 대표와 임학순(이하 임) 가톨릭대 교수, 김자현(이하 현) 시민교육본부장이 만났다.

당장 마을 단위로 시행될 문화예술교육 예산을 집행하는 기초자치체에 요구되는 건 기존의 ‘프로그램’ 중심에서 열린 ‘프로젝트’ 지향으로 사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일이다. 임 교수는 ‘리좀형’ 문화정책을 제시했다.

“현장에 프로그램이 들어갔다 빠지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예술가와 주민이 만날 거점이 필요하다. 기존 정책이 공모 사업에 선정되면 살아남고 떨어지면 사라지는 떠돌이 활동가를 양성했다면, 이제 동네 기반 거점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게 해야 한다.”(임) “현행 프로그램 지원 방식은 현장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다. 현장에선 이미 삶 안에서 일상적으로 동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8개월짜리 프로그램에 끼워 맞춰야 하는 상황이다. 일방적인 지원 시스템에서 벗어나 현장의 목소리를 세심하게 반영해야 한다.”(박)

그런데 틀이 사라지면 우왕좌왕하기 쉽다.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과 삶의 현장 속에 있는 주민이 자연스레 만날 수 있을까.

“결국 사람과 삶이 먼저다. 삶의 터전에서 발견되는 이슈들이 있다. 마을 숲·골목에서 주민과 예술가가 만나는 비정형 프로젝트가 기획되려면 자발적인 문화 형성 사례를 확장시켜 갈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은 삶과 일상에 기반한 프로젝트 개발을 고민해야 하고 거기에 지원이 따라줘야 된다.”(김) “지금까지는 지원사업에 종사하는 예술가들의 복지, 근무환경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열정페이 수준의 강사 사례비를 벗어나, 활동 주체인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일할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임) “지난 16년간 이 사업이 예술가 일자리 창출에도 큰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 생계를 넘어 예술에 대한 대국민 공감이 필요한 시점이다. 코로나가 터지자 제일 먼저 가위질 시작한 게 예술계였다. 예술의 가치부터 인정해야 일할 여건이 될 것 같다.”(박) “지역에서는 문화예술교육이 평생문화교육, 생활문화사업과 뭐가 다른지, 시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더라. 앞으로 진흥원과 시도단위 광역센터는 직접 지원보다 예술교육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식 확산 작업에 앞장서야 한다.”(임)

하지만 나랏돈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관리 책임이 있는 공공정책이 ‘비정형 리좀형’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당장 어떤 기준으로 이 ‘자유롭고 우발적인’ 예술활동을 평가해야 할까.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어 문화예술교육 판을 키운 유일한 사례다. 오직 성과를 위해 달려왔는데, 이제 교육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한발 떨어져 간접적으로 지원할 때다. 당장 코로나 때도 현장에서는 예술가들에게 더듬거릴 기회를 주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예술가적 상상력으로 방법을 찾아낼 거고, 그걸 뒤에서 지원해야지 자꾸 앞에서 견인하려고 하지 말라는 얘길 들었다.”(현) “문화예술 현장만이 가진 유연함이나 돌발상황에 맞게 진흥원이 지표를 개발해야 한다. 관습화되고 경직된 지표가 아니라 정성적 성과를 위한 지표를 개발해 달라.”(박)

“적은 예산으로 많은 사람이 수혜받는 효율성을 넘어 포스트코로나 시대엔 안전한 소수를 깊이 만나는 구조로 가야한다.”(김) “기존 정책은 수혜자 수로 성과를 평가하다 보니 현장 활동가들과 함께 고민할 기회를 놓쳤다. 지금 모든 부처가 인구소멸지역에 집중하는 것처럼 문체부는 문화취약지역에 집중해 차별화된 지표와 가치를 갖고 평가해야 한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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