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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한·미·일, 한물간 대북정책 되풀이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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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지금은 한반도와 주변엔 기이한 시기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북한 개입 정책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도 고갈됐다. 군사개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책을 시도했으나 다 실패했다. 강요·제재·대화·양보, 정상회담에 이은 정상회담, 1953년 휴전체제에 대한 변경 시도까지.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옛 정책을 유지하는 지경까지 갔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북한에 전제조건 없이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북한이 응하지 않을 것이란 게 분명해지면서 어떤 결과물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은 그런데도 더 나은 아이디어가 없고 다른 국제 현안이 시급해, 이 접근법을 고수하고 있다. 청와대도 다르지 않다. 2018년 진전이 있어 보였지만 옛일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마지막 시도로 종전선언을 밀고 있지만, 임기 내 성사 가능성은 없다. 미국의 입장이 아무리 좋게 봐도 미온적이어서다. 문 대통령은 그러나 대북관계를 포기한 듯 보일 수 없고, 새 아이디어도 없어서 종전선언을 계속 밀어붙일 것이다. 일본도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과 북한 미사일 문제에 있어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존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다.

군사개입 제외한 모든 시도 실패
북, 절박해지면 대화에 나설 수도

북한 정권의 시각에선 당혹스러울 것이다. 잠재적 대화 파트너들의, 플롯 전개 없이 의례적 몸짓으로 가득한 부조리극을 보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기회로 삼기도 어렵다. 북한 역시 정치적 수단이 제한돼서다. 그간 책략은 국가들을 이간하고 군사력을 과시해 위협하며 유리할 때만 협상하고 우방국과의 관계를 이용해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지난 2년간 여러 각도에서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남한과의 관계 진전으로 대중 의존도를 낮추려 했으나, 남한이 유엔 제재를 위반하면서까지 지원하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첨단 무기를 과시했으나 위협은커녕 짜증만 나게 했다. 미국은 대화 재개만으론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러시아는 북한보다 다른 문제(아프가니스탄·대만·벨라루스)에 골몰해있다.

북한이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용이하지 않다. 첫째, 수뇌부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제외하면 모두 고령이어서 시도는커녕 아이디어 수용도 힘들어한다. 둘째, 실패 대가가 성공 보상보다 훨씬 커서 대단히 신중하고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수뇌부가 불안정해진 조짐이 있다. 김 위원장은 35일간 두문불출하다가 지난달 16일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건강상 이유일까. 정치적 문제일까. 혹은 1차 세계대전 말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처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 칩거한 걸까. 어떤 이유든 김 위원장이 업무를 보지 않으면 새 시도도 없는 것이다.

북한의 입지는 날로 약해지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강경한 봉쇄로 여러 문제(불안정한 경제, 식량 공급 실패, 정권의 신뢰도 하락 등)가 심화했는데 오미크론 변이로 봉쇄 해제도 힘들게 됐다. 중국을 설득해 더 지원받지 않는 이상, 어느 시점에는 다른 국가와 타협해야 할 것이다.

앞서 그 대상이 미국·일본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 그렇다고 리스크가 없는 건 아니다. 김정은·트럼프(2018·2019년), 김정일·고이즈미(2002년·2004년) 회담은 수포가 됐다. 김 위원장과 참모들은 그런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미·일이 대화에 간절한 것도 아니다. 결국 다음 대화는 북한이 주도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 절박해져야 나설 것이란 점이다. 과거와 달리 북한이 불리한 입장에서 협상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때쯤이면 북한 주민의 고통은 진정 끔찍할 것이다. 좌절과 당혹에 빠진 북한 정권이 어리석고 위험한 짓을 하며 자기주장을 할 수도 있다. 이 부조리극이 비극으로 바뀌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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