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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피에 대출 규제…"더는 못 견뎌" 주식 팔고 돈 빼는 개미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주식 계좌를 개설한 김모(34)씨는 최근 이익은 물론 손해를 본 주식도 모두 팔았다. 올해 초 매수한 현대차와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대표 우량주가 하반기 들어서도 마이너스 수익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예·적금 금리가 너무 낮아 묵혀두면 바보라는 말에 주식 투자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원금만 까먹었다”고 토로했다.

올해 초 증시 활황 속 시장에 뛰어들었던 동학 개미들이 발을 뺄 채비를 하고 있다. 코스피가 3000선 밑에서 횡보하는 박스권 증시가 지속하면서다. 5개월여 이어진 약세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개인투자자는 지난달부터 백기를 들고 있다. 주식을 사기보다 더 많이 팔았다. 거의 1년 만이다.

주식 처분에 그치지 않고, 아예 국내 주식시장에서 돈을 빼는 흐름도 감지됐다. 부진한 증시로 인해 수익률이 떨어지는 데 비해 기준금리 인상 등의 영향으로 금리가 오르자 은행 등의 예·적금으로 이동하거나,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좋은 미국 시장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개인 주식 팔고, 돈 뺀다

올해 개인 투자자 순매수 추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올해 개인 투자자 순매수 추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지난 1월 한 달간 25조원의 순매수를 기록할 정도로 공격적이며 굳건했던 개미의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지난 10월 초다. 코스피 300선이 무너지며 횡보를 이어가자 마음을 바꿔먹은 것이다. 여기에 오미크론 공포가 증시를 덮치며 올해 상승분을 반납하자 우려는 더 커졌다.

그 결과 증시에서 개인이 팔아치운 주식이 산 주식보다 더 많았다. 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개인 투자자들은 국내 증시에서 2조3877억원을 순매도했다. 월간 기준으로 올해 첫 개인 순매도다.

주식을 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주식 시장에서 돈을 거둬들이는 조짐도 엿보인다. 신영증권에 따르면 국내 주식시장(코스피·코스닥)에서 개인의 ‘직접투자자금'이 지난달(11월 26일 기준) 2조3671억원 줄어들었다.

직접투자자금은 미수금 등 빚을 제외하고 고객이 증권사에 맡겨 놓은 예탁금과 개인이 주식을 사고판 금액 증감을 따져 실제 주식시장에 유입되는 돈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코로나19 여파로 급락한 증시에 개인 자금이 대거 유입된 지난해 이후 월 단위로는 최초 순유출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개인이 주식을 순매도하면 예탁금은 통상 2거래일 후 증가하는 흐름을 보여야 하는데, 최근에는 예탁금이 매도 금액만큼 늘지 않고 있다"며 “사실상 주식을 판 돈이 (증권) 계좌에서 빠져나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3월 직접투자자금은 27조원을 기록했다. 동학 개미의 저점 매수가 최고조에 달한 영향이다. 이후에도 개인 자금은 매달 주식시장으로 꾸준히 들어왔다. 그러나 델타 변이로 인한 코로나19재확산세가 본격화하고, 코스피가 박스권에 갇히며 지난 9~10월 자금 유입 규모가 각각 1조원대로 떨어진 뒤 지난달 결국 2조원 순유출로 전환한 것이다.

월별 직접투자자금 유출입.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월별 직접투자자금 유출입.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안전한 예·적금, 고수익 美시장으로 떠나  

증시를 떠난 자금의 행방은 엇갈린다. 고수익을 좇는 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좋은 미국 등 해외 시장으로, 안정성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은 예·적금으로 향한다는 분석이다. 편득현 NH투자증권 자산관리전략부장은 “올 하반기 들어 지지부진한 장이 펼쳐지면서 일부는 미국 주식으로, 또 초보 투자자는 은행으로 몰리는 '머니무브'가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은행 예·적금은 빠르게 늘고 있다. 은행권에 따르면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지난달 29일 기준 655조8962억원을 기록했다. 기준금리 인상 직전인 지난달 24일(653조1354억원)과 비교해 3영업일 만에 2조7608억원 증가했다. 지난 9월 말(632조5170억원)과 비교하면 두 달 사이 23조원이 늘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등의 영향으로 예·적금 금리가 오르자 지지부진한 수익에 원금 손실 위험이 큰 주식시장보다, 원금이 보장되고 안정적인 이자를 주는 예·적금이 낫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모습이다.

가계 빚 급증세를 막기 위한 금융당국의 전방위 대출 규제로 인해 신용대출 한도가 줄고 금리가 오르는 등 '빚투(빚내서 투자)'가 어려워진 것도 주식 시장에서의 자금 이탈을 가속화할 요인으로 꼽힌다. 강봉주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대출금리가 오르고 대출 한도는 줄면서 주식시장에 추가 자금 투입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빠르게 느는 5대 시중은행 정기예금.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빠르게 느는 5대 시중은행 정기예금.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S&P 22.4% 오를 때 코스피는 1.4% 하락

답답한 흐름을 보이는 국내 시장 대신 해외로 눈을 돌리는 투자자도 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해외주식 매수금액과 예탁금을 합친 외화증권 보관 잔액은 지난달 30일 기준 1021억3100만 달러(약 121조4000억원)를 기록했다. 지난 9월 말(897억1600만 달러)과 비교해 두 달 사이 14%나 늘었다.

'서학 개미' 행렬에 합류한 것은 미국 시장 수익률이 국내 시장보다 월등히 앞서기 때문이다. 지난 1일 기준 코스피는 지난 9월 30일보다 5% 넘게 하락했다. 같은 기간 S&P는 7% 상승했다. 연간 상승률로 따져도 코스피가 1.5% 하락할 때 S&P는 22.4%, 나스닥은 27.1% 상승했다.

편득현 부장은 “코스피 약세 속 저점 매수했던 개인들이 1년여간 이어진 횡보장에 지쳐 이번에는 떠나려는 듯한 모습”이라며 “패닉에 사로잡혀 팔면 손해를 보는 만큼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시장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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