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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범의 문화탐색

보랏빛 회색과 분홍빛 회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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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지하 전시실로 내려가자 야트막한 네 벽에 작품이 걸려 있고 한쪽에 작가가 앉아 있었다. 지난 9월 말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린 박영균의 전시회 ‘보라색 언덕 넘어’는 온통 보라색이었다. 박영균은 지난해 말에도 부산민주공원에서 개인전 ‘들여다 듣는 언덕’을 열었다. 박영균의 그림에서 보라색이 등장한 것은 2016년 ‘보라’ 시리즈부터인데, 이번에는 거의 모든 작품이 보라 일색이었다. 박영균은 민중미술 작가(?) 치고는 색채 감각이 풍부한 편이다. 그의 그림에는 빨강·파랑·노랑 등 다양한 색상이 넘실거린다. 박영균의 보라색 그림을 보자마자 나는 최민화의 분홍색 그림을 떠올렸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모종의 ‘동맹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최민화는 1987년 이한열 장례식의 걸개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가 1990년대 선보인 ‘분홍’ 연작은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향연이었다.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를 떠올릴 만한 이 작업은 그러나 피카소의 그것처럼 달콤하지는 않다. 그것은 차라리 멜랑콜리한 달콤함 또는 달콤쌉싸름한 우수(憂愁)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민화와 박영균은 둘 다 민중미술계의 중견 작가며, 나의 과거 동지들이다. 나는 1990년대 초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에 가입했고 거기에서 이들을 만났다.

민중화가 박영균·최민화
그들이 빚은 보라와 분홍
흑백 넘어선 자신의 색깔
이분법 사라진 요즘 시대

박영균 개인전 ‘보라색 언덕 넘어’, 학고재 아트센터, 2021.9.28~10.12 [사진 최범]

박영균 개인전 ‘보라색 언덕 넘어’, 학고재 아트센터, 2021.9.28~10.12 [사진 최범]

내가 그 둘의 작업을 연결한 고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라와 분홍 모두 원색이 아닌 혼색이라는 점이다.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가 되고 빨강에 하양을 더하면 분홍이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일단 개인의 색깔이라고 보았다. 보라와 분홍. 그것은 서로 다른 개별자의 얼굴이었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을 이끈 장르는 판화다. 이미 전설이 된 오윤으로 대표되는 목판화는 강렬한 흑백 대비와 날카로운 칼선으로 시대의 아픔을 후벼 파는 감동을 선사했다. 그것은 권력의 폭력 앞에서 저항용으로 뿌려지기도 하고 후미진 골방에서 민중의 분노와 애환을 삭히는 의식화 서적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멕시코 혁명기와 근대 중국 판화가 소개돼 열렬한 학습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판화는 독재와 민주, 외세와 민족, 매판과 민중이라는 이항대립적 현실에 대한 비판의 무기가 됐다. 그런 만큼 거기에 중간은 없었다. 흑과 백 이외의 어떠한 색채도 끼어들 수 없었다. 그것은 판화의 힘이기도 했지만 또 한계이기도 했다.

물론 민중미술에 판화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단순 대입해도 안 되지만, 1980년대 민중미술과 판화에서 그러한 현실 인식과 세계관을 떠올리는 것을 무리한 해석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재미역사학자 김남희가 지적한 “운동권의 ‘성난 마니교주의’, 즉 세계를 선과 악,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는 이분법”(‘민중 만들기’)과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다.

최민화의 ‘분홍 기타-상백리’, 1992. [사진 갤러리 현대]

최민화의 ‘분홍 기타-상백리’, 1992. [사진 갤러리 현대]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흑과 백, 그 둘 사이의 무수한 경계들을. 세상은 선과 악, 흑과 백이 아니라 그 안에 수백 배, 수천 배 넓은 회색지대를 품고 있다는 것을, 그 회색들은 사실 제각기 자기 색깔을 가진 회색이라는 것을, 최민화의 분홍과 박영균의 보라도 회색의 일종이라는 것을. 최민화는 첫 개인전인 ‘들풀 1985’의 작가 노트에서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흰색과 붉은색만을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분홍의 그 방대한 범주를 제시하고자 한다.”

“20세기 한국을 밀어온 힘은 진보에 대한 믿음이었다. 하지만 진보는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극단의 역사’를 노정해왔다. 야누스의 진보가 가진 양극단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를 정당화하는 역사 인식과 기술 태도를 성찰적으로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우리는 지난 시기 한국 사회가 이러한 열정에 휩싸였으며 또 그럴 만한 현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한때 진보라고 불렸던 가치들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영균의 보랏빛 그림과 최민화의 분홍빛 그림이 떠오르는 것을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흑과 백, 어느 하나로만 환원되지 않는 색깔들, 개인의 체험과 삶, 자신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다채롭고 아름다운 회색인 것이 아닐까. 회색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