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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봉쇄로 벨기에서 15일 고립…죽겠다 싶어 혼자 영화 찍었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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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배우 유태오가 셀프 다큐멘터리 ‘로그 인 벨지움’으로 감독 데뷔했다. [사진 엣나인 필름]

배우 유태오가 셀프 다큐멘터리 ‘로그 인 벨지움’으로 감독 데뷔했다. [사진 엣나인 필름]

코로나19 확산 초기,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갑작스러운 팬데믹 봉쇄에 갇혔다면.

지난해 봄 배우 유태오(40)가 겪은 실화다. 해외 드라마(‘더 윈도’) 촬영차 벨기에 앤트워프에 간 그는 팬데믹 선포로 호텔에 혼자 15일이나 발이 묶였다. 유럽 현지 스태프는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한국행 비행기 표는 기약 없이 취소됐다. 식당은 닫히고 근처 마트 진열대는 비어갔다.

“일주일이 지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이 낯선 나라에서 코로나에 걸린다면….’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땐 강박에 빠졌죠.”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유태오의 말이다. 당시 하필 요절한 할리우드 배우 히스 레저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단다. “히스 레저는 유명 배우고 그가 스스로 찍은 아카이브를 (사후에) 다른 감독이 편집해 다큐를 만든거죠. 저는 스타도 아니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상상 속에 그의 선택은 셀프 영화 촬영. 그의 각본·연출로 1일 개봉한 ‘로그 인 벨지움’ 탄생 배경이다. 이 영화는 그가 상상으로 빚은 ‘또 다른 나’까지 1인 2역을 맡아,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글 대신 영상으로 쓴 에세이다. 코로나 속 고독이 드러낸 ‘인간 유태오’의 민낯은 꽃과 요리와 예술에 대한 사랑이 매순간을 채운다. 명작 영화 오마주 장면도 많다. 음식 솜씨가 좋은 그가 직접 소를 만들어 만두를 빚어 먹는 장면은 홍콩영화 ‘중경상림’에서 착안했다. 다큐와 극영화의 오묘한 경계는 독일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작품에 영향 받았다.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 오손 웰스 감독의 ‘거짓의 F’, 즐겨 본 한국영화 ‘접속’ 등의 흔적도 발견된다. “어릴 때부터 힘들었을 때, 항상 영화가 주는 사랑과 위로로 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 영화 자체에 바치는 러브레터 같기도 하죠.”

독일 교포 2세인 그는 사진작가인 아내 니키 리와 한국에 와서 2009년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 단역부터 시작했다.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를 연기한 러시아 영화 ‘레토’로 2018년 칸영화제에 초청되며 무명을 벗기 시작했다. 이번 영화에는 여전히 서툰 한국말 발음 등 배우로서 고민도 그렸다. “멜랑콜리했던 과거, 시니컬한 현재, 미래의 꿈”에 대한 또 다른 나와의 대화를 각각 독일어, 영어, 한국어에 담아 표현했다.

서울에 돌아와 벨기에서 찍은 영상에 대해 배우 이제훈·천우희, 이재용 감독 등 지인들과 감상을 나누는 장면도 있다. “평론가가 저를 비평하기 전에 스스로 비평하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또 다른 제가 저 자신을 바라보며 ‘아이고 엄살 부리네’ 말했던 것처럼요.”

최근 그는 영화 ‘미나리’의 미국 영화사 A24와 CJ ENM이 함께 만드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스’의 주연에 캐스팅돼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교포로서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세계적 관심과 시장이 바뀌면서 한국이 리더가 됐잖아요. 이런 타이밍 덕분에 제가 태어나고 자란 배경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게 너무나 고마워요. 삶의 운인 것 같아요. ‘운명’이라 해야 하나. 5년 전만 해도 잘 안 되나보다, ‘팔자’라며 살았는데 참 신기하죠. 아무도 안 믿어줄 때 한 사람, 제 아내가 믿어준 게 힘이 됐어요. 이 영화도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어요. 편안하게 보고 좋은 메시지를 가져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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