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올해 배추 농사는 흉작이라지만 김장 인심은 풍작

중앙일보

입력 2021.12.01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209)

지금 우리 동네는 김장하느라 바쁘다. 기후이변으로 올해 배추농사는 흉작이다. 그래서 한포기에 4000원도 넘는다. 비싸든 싸든 김장을 한다는 건 어른들에겐 겨울을 이겨낼 든든한 비상식량이요. 일 년을 다시 산다는 뜻이다. 내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한다. 요즘은 전화만 하면 금방 담은 김치를 집 앞까지 갖다 준다, 가격도, 양도 적당하고, 맛도 좋다. 혼자 사는 나도 굳이 번거로이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엊그제, 딸은 시댁 김장하는 날이라며 부대를 끌고 시골로 갔다. 즐거이 집을 나서는 딸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힘든 일에 몸살 날까 걱정이 앞섰다.

다음날 사돈의 전화가 왔다. 김치 한 통이랑 절임배추도 조금 보낼 테니 동생, 이웃이랑 담아 나눠 먹으란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사실 귀찮고 양념장만도 힘든 일이라 감사 인사만 했다. 옆에서 대화를 엿듣던 앞집 언니가 받으라고 눈짓하며 옆구리를 찌른다.

“야야. 배춧값만 해도 얼마고? 비쌀 때 어려운 이들이랑 나눠 먹으면 더 좋잖아.”

“배춧값도 벌고, 소금도 벌고, 그런 김장은 열 번도 할따.”

아, 귀찮은데. 생배추면 보관이라도 되지만 절임배추는 당장 담아야 한다. 세수하기도 귀찮은 휴일이구먼. 내 주위엔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이 왜 이리 많은 거야.

김장날 아침, 엄청난 양의 절임배추에 한나절 양념을 섞다 끝내고 일어나니 허리가 안 펴졌다. [사진 Wikimedia Commons]

김장날 아침, 엄청난 양의 절임배추에 한나절 양념을 섞다 끝내고 일어나니 허리가 안 펴졌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싣고 온 절임배추는 엄청났다. 4인 가족 두세 집은 넉넉히 할 분량이다. 나는 호들갑스런 앞집 언니를 따라서 심부름하고 거드는 척했다. 냉장고 깊숙이 잠자던 양쪽 집 건어물 보태 육수를 달이고, 각종 젓갈을 집합시키고, 농사지은 고춧가루. 마늘. 생강, 무, 쪽파, 양파 등등 꺼내 까고 다듬고 양념하니 시간은 급행열차 달리듯 지나갔다. 이른 아침, 한나절을 양념 섞어 끝내고 일어서니 허리가 안 펴진다. 우리 먹을 거 각 한 통에, 마을 독거 어르신용으로 골고루 나눠 담고 김장할 엄두를 못 내는 나이 든 형제와 지인을 찾아 네 곳에 택배까지 부쳤다. 다시는 김장 안 할 거라 투덜대는 나와 절임배추 덕분에 좋은 일 했다며 웃는 언니.

“생각해 보소. 이런 걸, 님도 보고 뽕도 따고~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거야. 고마운 사돈 덕분에 농사지은 양념 조금만 보태면 여러 사람 비싼 김장 맛보잖아.”

주부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준 음식이라더니, 고맙다는 전화가 며칠째 온다. 한 분은 김칫값보다 더 비싼 금액과 선물을 보내왔다. 나는 억지로 끌려 한 일에 인사를 받으니 미안하고 겸연쩍었다. 앞집 언니 부처님이 말했다.

“야야, 농사지어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좋나, 모두 행복해하니 기분도 좋잖아.“

내일은 앞집이 정식으로 김장하는 날, 언니는 종일 허둥댄다. 냄비랑 그릇 다 꺼내놓고 씻고 닦고, 무 넣은 소고깃국도 진하게 끓인다.

“내일은 우리 상전 납시지요. 우리 집 상전이 소고기뭇국을 좋아하지요. 호호호.”

주부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준 음식이라더니, 고맙다는 전화가 며칠째 온다. 농사지어 나눌 수 있으니 참 좋다. [사진 pxhere]

주부들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남이 해준 음식이라더니, 고맙다는 전화가 며칠째 온다. 농사지어 나눌 수 있으니 참 좋다. [사진 pxhere]

피곤할 텐데도 그의 콧노래가 흥겹다. 며느리가 “안 먹어요, 못 가요”라는 말보다 불편하고 어수선한 시골로 시어머니 거들러 온다는 데야, 준비하는 기쁨은 설레고 즐거운 노동이다. 김장 뒤풀이를 끝내고 모두 떠난 자리, 남은 소금 물통에 배추가 또 절여지고 있었다. “다 돌렸는데 대구 사는 시동생네가 빠져서 또 절였제. 맛이라도 골고루 봐야제.”

“손 큰 시어머니 때문에 김장하느라 힘들었지?”

오자마자 퍼져서 내리 잤다는 딸이 걱정되어 물으니 그의 대답이 어이없다.

“힘들긴, 부모님이 거의 다 해놓으시고 체험용으로 조금 남겨두셔. 우린 어머님이 재어 놓은 고기 구워 먹고 술 마시고 놀다가 아침에 모두 자기 김치통 찾아서 헤어지는 거지. 피곤해 죽겠다는 말? 아 그거 술이 덜 깼다는 말이야. 호호.”

어느 심리학 교수가 말했다. 노년의 일상에선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고, 아낌없이 나누고 해 줄 수 있을 때 마음을 다하는 어른들의 열정이 부럽다. 매번 올해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사시지만 다시 한해를 살게 해주는 사랑의 힘이다. ‘죽는 날을 놓고 계산하면 오늘이 가장 젊은 날.’ 아직은 나도 끌려다니기보다 내가 앞장 설 나이인데 오늘도 반성할 거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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