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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기존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균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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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주 전 샌프란시스코 출장 중 방문한 스탠퍼드 공대 디자인스쿨(d.school)은 모든 화장실을 남녀 공용 화장실로 바꾸는 리모델링 공사로 분주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50만 달러 이상 되는 리모델링 공사를 하게 되면 성 소수자들을 위해 화장실을 남녀 분리가 아니라 공용 화장실로만 설치하는 법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성은 타고난 생물학적 성별(sex)뿐 아니라 사회적 성별인 젠더(gender)도 존재하고 이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보건부 차관보와 공중보건서비스단장으로 4성 장군이 된 레이철 레빈(Rachel Levine)은 상원 인준을 통과한 최초의 트랜스젠더 각료가 되었다. 원래 리처드 레빈이었던 남성에서 레이철 레빈인 여성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선택한 레빈은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소아정신과 의사 출신이다. 뉴욕타임스에서도 이제는 그를 그녀(she)라고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다.

21세기 문명사적 대전환기 맞아
사회적 성별도 선택하는 시대
수월성보다 다양성 강조하는 공정
갈등 증폭보다 사회통합 앞장서야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모든 학생들은 이름 뒤에 괄호로 그(he) 또는 그녀(she)라는 성 정체성을 표기한다고 한다. 자신의 몸은 태어난 그대로가 아니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문신(tatoo)은 기본이고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유전적 질병을 사전에 차단한다. 안젤리나 졸리처럼 유방암 유전자를 갖고 있으면 유방절제 수술을 미리 하기도 한다. 이제 타고난 몸을 자신의 뜻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은 예사가 되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하나도 손댈 수 없다고 상투 자르기를 거부했던 구한말 유생들의 모습이 새롭다.

21세기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디지털 혁명뿐 아니라 사고의 혁명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족의 개념도 바뀐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국가가 관리하고 이혼을 사법기관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동거와 같은 사실혼이 주를 이루고 공식 결혼은 1년에 인구 1000명 당 평균 4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직도 낙태를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개인의 선택권 침해인지 생명권 존중 침해인지 논란이 혼란스럽다.

우리도 출생률은 전 세계 최하위이지만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가정이 늘고 있다. 원래 반려(伴侶)라는 단어는 인간의 반쪽이라는 뜻으로 남녀가 만나서 평생을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는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호칭이 바뀌었고, 이들에 대한 학대는 아동학대 못지않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비건들은 대학 내에 채식전용 구내식당 설치를 요구한다. 식물성 고기인 대체육(alternaive meat)으로 햄버거를 만드는 사업도 급성장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 대학교수는 『공정이라는 착각』에서 수능시험과 같은 S.A.T. 성적으로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사회경제적 배경의 영향을 받는 성적으로 학생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도 있지만 미국에서는 올해 많은 대학에서 학부 입학조건에서 S.A.T. 성적 제출을 의무화하지 않는다. 스탠퍼드나 예일 등 명문 대학원에서도 대학원 자격시험인 GRE 성적을 보지 않기 시작했다. 오히려 공정이나 공평의 관점에서 많은 대학에서 수월성보다는 다양성을 강조한다. 이런 결과로 작년 하버드대학 신입생 중 흑인 비율은 재작년 14.8%에서 18%로, 아시아계는 24.5%에서 27.2%로 상승했다고 한다.

기존 질서의 붕괴는 대학교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성별에 의한 차별뿐 아니라 나이에 의한 차별도 헌법적 가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대학교수 정년제가 없어진지 오래되었다. 반면에 학문의 자유를 위해 대학에서 종신교수직을 인정하던 것도 무너지고 있다. 조지아주는 대학이사회에 종신교수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정책을 만들었다. 대학교수의 연구나 교육의 자율권보다 ‘학생성공(student success)’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미국 대학들에서 종신교수의 비율이 10% 미만으로 내려가고 있어서 조지아주의 정책이 낯설지만은 않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도 있다.

이번 대선에서 MZ세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후보나 당이 젊은이들을 위한 정책을 앞세우고 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인식의 대전환 앞에 젊은이들의 생각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섣부른 정책만 제시하면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질서의 붕괴는 새로운 균형을 이루기까지 갈등의 고통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다수라고 해서 이를 억누르거나 소수라고 해서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갈등은 사회에 이롭지 않다. 자유론의 대가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는 천부적인 권리로 누구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예외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는 없다”고 했다. 이제 나라를 이끌겠다는 정치 지도자들이 기존 질서의 붕괴에 따른 갈등을 증폭시켜 사회를 갈라놓기 보다는 새로운 균형의 시대에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껴안으며 사회 통합에 앞장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