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마음 읽기

12월의 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열두 달 가운데 맨 끝 달인 십이월을 맞았다. 한 해가 지나감이 이렇게 빠른가 싶다. 그러나 한 해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입과 코를 가린 채 살다보니 마치 올해의 시간도, 세월도 마스크를 쓴 듯해서 언뜻 한 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들의 얼굴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제주에도 곧 추위가 시작될 모양이다. 따뜻한 곳이지만 바람의 찬 기운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제주 어디에서나 우러러볼 수 있는 한라산 맨 꼭대기에는 흰 눈이 쌓였다. 이제 봄이 완연할 때까지 눈으로 덮인 산봉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시인 정지용은 시 ‘백록담’에서 “해발 육천 척(呎) 위에서” 말과 소를 만난 경험을 썼다. 어미를 잃은 어린 송아지가 우는 것을 보았고, 그 송아지가 말과 사람을 보고서 매달리는 것에 연민을 느꼈다. 그리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라고 적었다.

일몰을 보며 한 해를 돌아보게 돼
그르친 일과 잘 된 일이 함께 있어
맨 끝이자 끝이 아닌 십이월의 때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한 시인의 참담한 내면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이 대목은 생명 존재의 회피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적은 것이기도 할 터이다. 다만 나는 한라산 설봉(雪峰)을 바라보면서 이 시를 떠올려 잠시 한뎃잠을 자는 생명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곤 하는 것이다.

요즘 제주의 해 지는 시간은 오후 5시 25분경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때라 그런지 이 일몰을 보고 느끼는 감회가 각별하다. 한 지인은 제주도의 작은 섬에 머무르면서 해 뜨는 시간과 해 지는 시간에 알람시계를 맞춰 놓고 그 두 때가 되면 날마다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무엇을 느꼈는지를 묻지는 않았지만, 일출과 일몰의 장엄한 광경 앞에 선 한 사람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요즘 이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게도 되지만 이내 곧 숙연해지고 마음 한구석엔 무언가가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망친 일을 되살리려는 사람은 낭떠러지에 가까이 간 말을 부리는 것처럼 채찍을 함부로 휘두르지 말아야 하며, 거의 완성을 눈앞에 둔 사람은 여울을 거슬러 배를 끌어올리듯 잠시도 노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은 『채근담』에 실려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망친 일도 있고 그럴듯하게 잘 된 일도 있게 마련일 테다. 가령 십이월의 자연을 보아도 성쇠(盛衰)가 있다. 어떤 것은 성해지고 어떤 것은 쇠퇴한다. 물든 나뭇잎들은 대개 다 떨어지지만 귤나무에는 귤이 날마다 달콤해지고, 더 많은 풀과 꽃이 시들지만 수선화와 동백은 피어나고 있다. 다만 『채근담』의 문장에서 헤아려야 할 뜻은 망친 일과 완성을 앞둔 일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망쳤다고 해서 돌이킬 수 없는 벼랑으로 몰지 말 일이며, 잘 마무리가 될 것 같다고 해서 느슨한 게으름을 피우지 말 일이다.

나는 12월을 맞으며 졸시 ‘12월의 일’을 썼다. “무엇을 할까/ 북쪽에/ 끝에 섰으니// 12월에 무엇을 할까/ 긴 투병기 같은/ 마른 덩굴을 거두어들이는 일 외에// 꺾인 풀/ 왜소한 그늘/ 흩어진 빛/ 가는 유랑민// 그러나/ 새로이 받아든 동그란 씨앗/ 대지의 자서전”이라고 썼다. 십이월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극(極)일 테다. 봄과 여름과 가을의 시간이 하나의 마른 덩굴로 남아서 이제 그 덩굴을 거둬들이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찬찬하게 생각해보면 십이월은 빈손에 동그란 씨앗을 쥐게 된 때와 같다. 물론 그 씨앗에는 생명의 이력이 담겨 있고, 그리하여 십이월은 생명의 자서전이 완성되는 때이다. 게다가 발아의 내일이 예비되어 있다. 하나의 극이면서 극이 아닌 셈이다.

내게 올해는 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사와 살면서 가족과 지인들이 더러 찾아 왔다. 먼 길을 왔고, 또 한꺼번에 함께 올 수 없어서 시간을 쪼개서 왔지만 어느 해보다 사람을 맞이하는 일이 특별했다. 서로 나눌 얘기가 산처럼 쌓여서 그것을 앞에 모두 부려놓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되었고, 사람이 안겨주는 선심(善心)에 대해서도 여러 날에 걸쳐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온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헤어지는 일은 무거웠다. 무심하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는 유난히 만나고 이별하는 일에 관하여 드는 생각이 많았다. 만나는 일이나 헤어지는 일이나 원래 그러한 것이고, 또 만날 기약이 있으면 족한 일 아니냐는 생각에도 어느 때에는 이르게 되었지만 말이다. 만남의 지속과 새로운 결별이 이 십이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