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기업들이 속속 내년도 임원명단을 발표하는 가운데 피앤지(P&G, Procter& Gamble) 출신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P&G는 1837년 설립된 미국의 생활용품 기업으로 ‘아이보리(비누)’ ‘다우니(섬유유연제)’ ‘질레트(면도기)’ 등의 브랜드로 친숙하다.
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비대면 소비 시대에 새로운 마케팅·브랜드 전략의 중요성이 높아진 데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공’시킬 증명된 글로벌 경영자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충성심만으로 승진하는 시대 갔다”
롯데그룹은 지난 25일 오랜 ‘순혈주의’를 깨고 P&G 아세안 총괄사장을 지낸 김상현(58) 부회장을 영입해 유통 사업군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 대표로 임명했다. 외부 인사가 롯데쇼핑 대표를 맡은 건 1979년 기업 설립 이래 42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 1986년 P&G에 입사한 김 부회장은 P&G 내에서 아시아계로는 최고위 임원에 오른 인물 중 하나다. 1989년 한국에 P&G가 설립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2015년엔 미국 본사 부사장으로 신규 시장 부문을 이끌기도 했다.
인사 직후 롯데 관계자는 “기존에 하던 일들을 계속 열심히 하는 걸로는 사업을 계속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그룹의) 밑에서부터 올라온 사람들이 충성심 하나로 계속 승진하는 관례는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해외 영토 노리는 LG의 ‘P&G’ 선후배
같은 날 LG생활건강이 발표한 임원 인사에선 이창엽(54) 부사장이 사업본부장(COO)에 선임됐다. 기업의 핵심 사업인 화장품과 생활용품 사업을 총괄하는 자리다.
이 부사장 역시 1990년 P&G 미국 본사의 영업 부문으로 입사해 아시아와 북미 사업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차석용(68) LG생활건강 부회장과는 P&G 선·후배 관계로 인연이 깊다.
실제 차 부회장은 P&G 출신 기업인의 맹주 격이다. 지난 1985년 미국 P&G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아시아 사업본부 사장과 한국총괄사장을 지낸 뒤 해태제과 대표, LG생활건강 대표, 코카콜라음료 대표를 거쳐 올해로 17년째 LG생활건강을 이끌고 있는 장수 최고경영자(CEO)다. 해외 전략통인 이 부사장은 차 회장의 ‘복심’으로 통하며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글로벌 사업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이커머스 전문가 영입
지난달 임명된 신세계까사 최문석(53) 대표는 신계계그룹이 2018년 가구업체 까사미아를 인수한 뒤 처음 임명한 외부 출신 임원으로, 1992년 한국 P&G 브랜드 매니저로 첫발을 내디뎠다. 최 대표는 이베이코리아 부사장, 써머스플랫폼(옛 에누리닷컴) 대표, 여기어때컴퍼니 대표 등을 역임한 이커머스 전문가다. 리빙·인테리어 시장에서 온라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한 수로 풀이된다.
국내 1위 콜센터 아웃소싱 기업인 ‘유베이스’는 지난달 한국 IBM의 송기홍(54) 사장을 신임 대표로 임명했다. 사람의 전화 응대 위주인 고객센터에 인공지능을 접목한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구축하고 활성화하는 게 그의 과제다. 송 대표는 1992년 P&G 브랜드 매니저로 입사해 맥킨지·딜로이트·모니터그룹 등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에서 국내외 기업의 위기극복 전략을 이끌어 왔다. IBM에서도 최근 5년간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등 디지털 산업을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했다.
문화·명품산업에도 줄줄이 포진
지난달, 8개월 가까이 공석이었던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를 맡은 손은경(52) 대표와 올 3월 카카오엔터테인먼트 공동대표에 오른 이진수(48) 대표도 P&G를 거쳤다.
손 대표는 CJ에서 한식 브랜드 ‘비비고’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마케팅 전문가로, 국내외에서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높일 방안에 집중한다. 카카오페이지의 전신인 ‘포도트리’ 창업자인 이진수 대표는 웹툰·가요·드라마 등 한국 콘텐트가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북미 등 해외 콘텐트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이 밖에 P&G 미국 본사의 브랜드 매니저 출신인 한승헌(60) 사장이 지난 2012년부터 세계 최고 럭셔리 브랜드로 통하는 에르메스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다. 한 대표는 P&G 한국·아시아본부·일본을 거쳐, NHN 최고마케팅책임자(CMO)와 LG전자 유럽지역대표로 활약했다.
‘마케팅’ 아닌 ‘경영’을 가르친다
업계에서 P&G는 ‘마케팅 사관학교’로 통한다. 하지만 직접 P&G에서 일해 본 사람들은 P&G의 핵심 역량은 마케팅이 아니라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즉 경영 자체라고 입을 모은다.
일례로 P&G에선 입사 초년 시절부터 브랜드 매니저로서 마케팅 부서를 중심으로 영업·재무·생산관리 등 제품과 관련한 모든 부서를 이끌고 일하도록 한다. 이에 따른 권한과 책임을 함께 준다. 어릴 때부터 CEO의 시각에서 브랜드를 성공시키기 위한 수업을 받는 셈이다. 전 세계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의 이름도 ‘P&G CEO 챌린지’다.
또 P&G는 직원들이 “마치 학교에 다니는 것 같다”고 할 만큼 부서별·업무별·지역별 교육을 중시한다. 인사 고과의 절반이 부하직원 훈련 성과로 매겨질 정도로 조직문화에 ‘리더 양성’이 체화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CEO 사관학교’로서의 특징이 최근 위기 국면에서 P&G 출신이 약진하는 근본 이유라고 분석한다.
184년 정상에 머문 비결은?
실제 P&G는 단일 기업으로는 CEO를 가장 많이 배출한 회사로 유명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스티브 발머,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프 이멜트, AOL(아메리카온라인)의 스티브 케이스, 3M의 짐 맥너니, 이베이의 멕 휘트먼 등 내로라하는 CEO들이 P&G 출신이다. 이 때문에 P&G에 근무했던 직원들은 회사를 나온 뒤에도 ‘P&G 얼럼나이(동문회)’란 이름으로 불린다.
신동엽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세계적으로 100년이 된 기업들은 꽤 있지만 200년 가까이 세계 정상에 있는 소비재 회사는 P&G가 거의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그 비결로는 “마케팅은 물론 조직·인사 등에서 늘 새로운 시도를 가장 먼저 하는 ‘상시 혁신’ 조직문화”를 꼽았다.
신 교수는 “P&G는 180년이 넘는 동안 전쟁과 경제 대공황 등 대격변기에서 살아남았고 지금도 정상에 있다”며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가 겹친 격변기에 한국 기업들도 간헐적 성과주의가 아니라 패러다임 전환 수준의 혁신 문화를 심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