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는 'CEO 사관학교'…롯데·LG·카카오엔터까지 죄다 꿰찼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30 07:15

업데이트 2021.11.30 12:22

연말을 맞아 기업들이 속속 내년도 임원명단을 발표하는 가운데 피앤지(P&G, Procter& Gamble) 출신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P&G는 1837년 설립된 미국의 생활용품 기업으로 ‘아이보리(비누)’ ‘다우니(섬유유연제)’ ‘질레트(면도기)’ 등의 브랜드로 친숙하다.
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비대면 소비 시대에 새로운 마케팅·브랜드 전략의 중요성이 높아진 데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공’시킬 증명된 글로벌 경영자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충성심만으로 승진하는 시대 갔다”

롯데그룹 유통군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주) 대표로 내정된 김상현 부회장. 사진 롯데

롯데그룹 유통군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주) 대표로 내정된 김상현 부회장. 사진 롯데

롯데그룹은 지난 25일 오랜 ‘순혈주의’를 깨고 P&G 아세안 총괄사장을 지낸 김상현(58) 부회장을 영입해 유통 사업군 총괄대표 겸 롯데쇼핑 대표로 임명했다. 외부 인사가 롯데쇼핑 대표를 맡은 건 1979년 기업 설립 이래 42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 1986년 P&G에 입사한 김 부회장은 P&G 내에서 아시아계로는 최고위 임원에 오른 인물 중 하나다. 1989년 한국에 P&G가 설립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2015년엔 미국 본사 부사장으로 신규 시장 부문을 이끌기도 했다.

최고경영진에 포진된 P&G 출신 주요 기업인.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최고경영진에 포진된 P&G 출신 주요 기업인.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인사 직후 롯데 관계자는 “기존에 하던 일들을 계속 열심히 하는 걸로는 사업을 계속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그룹의) 밑에서부터 올라온 사람들이 충성심 하나로 계속 승진하는 관례는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해외 영토 노리는 LG의 ‘P&G’ 선후배  

이창엽 LG생활건강 사업본부장(COO,부사장). 사진 LG생활건강

이창엽 LG생활건강 사업본부장(COO,부사장). 사진 LG생활건강

같은 날 LG생활건강이 발표한 임원 인사에선 이창엽(54) 부사장이 사업본부장(COO)에 선임됐다. 기업의 핵심 사업인 화장품과 생활용품 사업을 총괄하는 자리다.

이 부사장 역시 1990년 P&G 미국 본사의 영업 부문으로 입사해 아시아와 북미 사업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차석용(68) LG생활건강 부회장과는 P&G 선·후배 관계로 인연이 깊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사진 LG생활건강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사진 LG생활건강

실제 차 부회장은 P&G 출신 기업인의 맹주 격이다. 지난 1985년 미국 P&G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아시아 사업본부 사장과 한국총괄사장을 지낸 뒤 해태제과 대표, LG생활건강 대표, 코카콜라음료 대표를 거쳐 올해로 17년째 LG생활건강을 이끌고 있는 장수 최고경영자(CEO)다. 해외 전략통인 이 부사장은 차 회장의 ‘복심’으로 통하며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글로벌 사업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이커머스 전문가 영입 

최문석 신세계까사 신임 대표. P&G 출신으로 이베이코리아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지마켓 인수를 총괄했다. 지마켓과 옥션의 합병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국내 대표 이커머스 및 마케팅 전문가로 꼽힌다. 사진 중앙포토

최문석 신세계까사 신임 대표. P&G 출신으로 이베이코리아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지마켓 인수를 총괄했다. 지마켓과 옥션의 합병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국내 대표 이커머스 및 마케팅 전문가로 꼽힌다. 사진 중앙포토

지난달 임명된 신세계까사 최문석(53) 대표는 신계계그룹이 2018년 가구업체 까사미아를 인수한 뒤 처음 임명한 외부 출신 임원으로, 1992년 한국 P&G 브랜드 매니저로 첫발을 내디뎠다. 최 대표는 이베이코리아 부사장, 써머스플랫폼(옛 에누리닷컴) 대표, 여기어때컴퍼니 대표 등을 역임한 이커머스 전문가다. 리빙·인테리어 시장에서 온라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한 수로 풀이된다.

송기홍 유베이스 신임 대표. 사진 중앙포토

송기홍 유베이스 신임 대표. 사진 중앙포토

국내 1위 콜센터 아웃소싱 기업인 ‘유베이스’는 지난달 한국 IBM의 송기홍(54) 사장을 신임 대표로 임명했다. 사람의 전화 응대 위주인 고객센터에 인공지능을 접목한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구축하고 활성화하는 게 그의 과제다. 송 대표는 1992년 P&G 브랜드 매니저로 입사해 맥킨지·딜로이트·모니터그룹 등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에서 국내외 기업의 위기극복 전략을 이끌어 왔다. IBM에서도 최근 5년간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등 디지털 산업을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했다.

문화·명품산업에도 줄줄이 포진

지난달, 8개월 가까이 공석이었던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를 맡은 손은경(52) 대표와 올 3월 카카오엔터테인먼트 공동대표에 오른 이진수(48) 대표도 P&G를 거쳤다.

손은경 서울시향 신임 대표. 사진 서울시향

손은경 서울시향 신임 대표. 사진 서울시향

이진수 카카오페이지 대표가 1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카카오페이지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이 대표는 "일본 시장을 거점으로 올해 글로벌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올해 중국, 대만, 태국 등 아시아는 물론 북미 진출을 위한 발판을 공고히 다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이진수 카카오페이지 대표가 1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카카오페이지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이 대표는 "일본 시장을 거점으로 올해 글로벌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올해 중국, 대만, 태국 등 아시아는 물론 북미 진출을 위한 발판을 공고히 다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손 대표는 CJ에서 한식 브랜드 ‘비비고’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마케팅 전문가로, 국내외에서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높일 방안에 집중한다. 카카오페이지의 전신인 ‘포도트리’ 창업자인 이진수 대표는 웹툰·가요·드라마 등 한국 콘텐트가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북미 등 해외 콘텐트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한승헌 에르메스코리아 대표(왼쪽)가 지난 18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아름다운예술인상'에 참석해 안성기 이사장으로부터 공로 감사패를 수상한 모습. 사진 뉴스1

한승헌 에르메스코리아 대표(왼쪽)가 지난 18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아름다운예술인상'에 참석해 안성기 이사장으로부터 공로 감사패를 수상한 모습. 사진 뉴스1

이 밖에 P&G 미국 본사의 브랜드 매니저 출신인 한승헌(60) 사장이 지난 2012년부터 세계 최고 럭셔리 브랜드로 통하는 에르메스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다. 한 대표는 P&G 한국·아시아본부·일본을 거쳐, NHN 최고마케팅책임자(CMO)와 LG전자 유럽지역대표로 활약했다.

‘마케팅’ 아닌 ‘경영’을 가르친다 

업계에서 P&G는 ‘마케팅 사관학교’로 통한다. 하지만 직접 P&G에서 일해 본 사람들은 P&G의 핵심 역량은 마케팅이 아니라 ‘비즈니스 매니지먼트’, 즉 경영 자체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 신시내티에 위치한 P&G본사. 사진 연합뉴스

미국 신시내티에 위치한 P&G본사. 사진 연합뉴스

일례로 P&G에선 입사 초년 시절부터 브랜드 매니저로서 마케팅 부서를 중심으로 영업·재무·생산관리 등 제품과 관련한 모든 부서를 이끌고 일하도록 한다. 이에 따른 권한과 책임을 함께 준다. 어릴 때부터 CEO의 시각에서 브랜드를 성공시키기 위한 수업을 받는 셈이다. 전 세계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의 이름도 ‘P&G CEO 챌린지’다.
또 P&G는 직원들이 “마치 학교에 다니는 것 같다”고 할 만큼 부서별·업무별·지역별 교육을 중시한다. 인사 고과의 절반이 부하직원 훈련 성과로 매겨질 정도로 조직문화에 ‘리더 양성’이 체화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CEO 사관학교’로서의 특징이 최근 위기 국면에서 P&G 출신이 약진하는 근본 이유라고 분석한다.

184년 정상에 머문 비결은? 

실제 P&G는 단일 기업으로는 CEO를 가장 많이 배출한 회사로 유명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스티브 발머,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프 이멜트, AOL(아메리카온라인)의 스티브 케이스, 3M의 짐 맥너니, 이베이의 멕 휘트먼 등 내로라하는 CEO들이 P&G 출신이다. 이 때문에 P&G에 근무했던 직원들은 회사를 나온 뒤에도 ‘P&G 얼럼나이(동문회)’란 이름으로 불린다.

신동엽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세계적으로 100년이 된 기업들은 꽤 있지만 200년 가까이 세계 정상에 있는 소비재 회사는 P&G가 거의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그 비결로는 “마케팅은 물론 조직·인사 등에서 늘 새로운 시도를 가장 먼저 하는 ‘상시 혁신’ 조직문화”를 꼽았다.
신 교수는 “P&G는 180년이 넘는 동안 전쟁과 경제 대공황 등 대격변기에서 살아남았고 지금도 정상에 있다”며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가 겹친 격변기에 한국 기업들도 간헐적 성과주의가 아니라 패러다임 전환 수준의 혁신 문화를 심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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