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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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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2015년 3월경, 평소와 같이 병원에서 아침 일찍 외국인 환자들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연세의료원 의료원장님께서 전화하셔서 “요한, 뉴스 속보 봤는가?”라고 물어보셨다. 의료원장님은 미국 대사께서 괴한에게 칼을 맞았으니 빨리 이송된 병원에 가서 대사님을 우리 병원으로 모셔오라고 하셨다. “이송된 병원에서 치료 잘 받겠지요”라고 대답했지만, 우리 병원 원장님이자 나와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선배님께서 재차 지시하셔서 이내 가겠다고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타면서도 속으로는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다. 도대체 어떤 명분으로 대사님을 우리 병원에 모시고 올 것인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대사 사모님께서 우리 병원에 다니고 계셨으니 내가 그 가족 주치의로서 말씀드리면 될까 하고 고민하던 중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미대사관 주치의가 연락을 해왔다. 미대사관 주치의는 대사께서 얼굴을 심하게 다치고 괴한의 칼에 손목이 관통됐는데 어디서 어떻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5분 내로 도착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2015년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
완쾌 기원한 많은 한국인에 감동
두 나라 사이 신뢰 더욱 깊어져

병원 앞은 경찰과 기자 수십 명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주치의임을 밝히고 경찰 폴리스라인을 뚫고 대사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갔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이송된 병원의 병원장님도 내려와 계셨다. 나는 대사님의 안위가 걱정되면서도 대사님을 우리 병원으로 모셔갈 생각에 미안한 마음으로 심경이 복잡했다. 대사님의 의식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영어로 대사님께 병원을 옮기실지를 여쭈어보았다. 다행히 대사님께서 우리 병원으로의 이동을 희망하셨다.

그러나 대사님을 이송하려고 하니 어떻게 많은 카메라를 피해서 이 병원에 피해를 주지 않고 떠날지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이송된 병원에서 얼굴 CT를 찍어야 한다고 하셔서 CT를 찍는 동안에 그 병원 원장님께 가까운 비상구 위치를 확인하였다. 그 비상구는 한 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대사님께서 다행히 한 층 정도는 걸어 올라가실 수 있다고 하셔서 구급차를 그 비상구 쪽으로 불러 기자들을 피해 대사님을 모시고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들이었지만 피습당한 미 대사를 조용히 이송한다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동기인 성형외과 유 교수와 후배인 수부 정형외과 최 교수에게 연락해서 수술실에 빨리 오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대사님께 우리 세브란스는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씨의 암살 시도 사건을 계기로 1885년에 시작된 병원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래서 무조건 서울에서는 대사님께서 우리 병원 외에 다른 병원을 가셔서는 안 된다고 농담도 했다. 심각한 상황에서 대사님의 마음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한 나의 배려였다. 병원에 도착해 바로 대사님을 수술실로 모시고 올라갔다. 수술실 근처에는 이미 병원의 여러 관계자가 잔뜩 와있었고 병원도 이미 비상이었다. 마취 담당 교수께서 바로 수술을 위한 마취를 시행하려고 하시기에 나는 대사님께서 의식이 있을 때 먼저 진찰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마취 전에 성형외과 교수와 수부 정형외과 교수에게 진찰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 대사 사모님과 한미연합사령관께서도 도착하셔서 대사 사모님은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시도록 하고, 사령관님과 나는 수술실 안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술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서도 미국에서도 10시간 가까이 걸릴 수술을 우리 병원은 2시간 반 만에 얼굴 봉합을 끝내고 손목의 끊어진 말초신경도 현미경을 사용한 접합 수술로 완벽하게 마쳤다.

그렇게 대사님의 수술과 치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얼마 후 대사님도 무사히 퇴원하셨다. 이 무렵 나는 두 가지 일로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수십 명의 사람이 대사님의 병원비를 대신 계산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대사관저에 꽃집을 서너 개를 차릴 정도로 대사님의 쾌유를 기원하는 많은 꽃이 와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나는 한국인의 정을 마음 깊이 진하게 느꼈다. 더불어 나의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다. 미 대사님의 피습 사건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한국과 미국이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깨닫게 되고 더욱 가까워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날의 사건은 정치나 국가 외교의 차원을 넘어선 대한민국 국민의 따뜻하고 넘치는 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