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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년 전 日 '먹방 문학' 번역자 “식문화가 그 사회의 수준”

중앙일보

입력

20세기 초 일본의 자산가로 손꼽힌 이와사키가의 부엌을 미즈노 도시카타 화백이 묘사한 그림. 『식도락』 여름 편에 실렸다.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20세기 초 일본의 자산가로 손꼽힌 이와사키가의 부엌을 미즈노 도시카타 화백이 묘사한 그림. 『식도락』 여름 편에 실렸다.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우선 유부를 두 장 잘라서 가늘게 썰어 일단 데쳐 놓고, 가쓰오부시 육수와 간장, 설탕을 넣은 물에 푹 끓인 뒤에 유부만 건져 낸 다음, 남은 육수에 전분을 넣어 걸쭉해지면 달걀을 넣어 잘 휘저어 풀어 준 뒤, 그 걸쭉한 국물을 아까의 유부 위에 뿌려서 내요.”

무라이 겐사이의 1903년작 『식도락』 #전4권 우리말로 번역하는 박진아 #"음식에 그 사회의 문화와 전통 담겨있다" #음식의 실감나는 묘사부터 #식생활 관련 서술까지

요즘 ‘쿡방’이 아니고, 118년 전의 글이다. 일본 작가 무라이 겐사이(1864~1927)가 1903년 호치신문에 연재한 소설 『식도락』 중 ‘여름’의 한 대목이다. 사계절에 걸쳐 총 4부작에서 소개하는 음식은 600여종. 이 방대한 저작이 한국에서 출간 중이다. ‘봄’편은 지난해, ‘여름’은 지난달 나왔고, ‘가을’과 ‘겨울’이 출간 준비 중이다. 각 400페이지가 넘는다.

첫 한국어 번역을 하고 있는 박진아(36, 도쿄대 박사과정)씨는 서면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일본 미식 문화가 시작된 작품으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식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소개했다. 또 일본을 넘어서 인기를 끌었던 '맛의 달인' '고독한 미식가' '심야식당' 등 일본 ‘구르메 문화’의 원조로 『식도락』이 지목된다고 덧붙였다.

『식도락』을 번역한 박진아. [사진 박진아]

『식도락』을 번역한 박진아. [사진 박진아]

음식에 대한 탐미는 물론이고 먹는 일의 의미를 돌아본다는 점에서 21세기에도 영향력을 가진다. 소설은 김말이 초밥, 도미 요리, 토마토 밥 등에 대한 실감 나는 묘사뿐 아니라 부엌의 위생, 위장병, 재료의 경제성까지 다루고 있다. 박진아는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일본과 현대의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통용되는 문제”라고 했다. “한 사회의 음식은 그 사회의 문화 수준과 전통을 담고 있다. 무라이 겐사이는 식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건강한 식재료, 오염되지 않은 환경, 공정한 가공 및 유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지금 읽어봐도 유효하다.”

박진아씨는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전공으로 나쓰메 소세키(1867~1916)를 연구한다. “같은 시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던 중 이 작품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한국에서 번역된 적이 없어 안타까웠다.” 그는 일본뿐 아니라 조선, 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의 식재료, 조리법, 음식을 다룬 내용이 한국의 현대인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 “일본이 제국주의 노선을 본격화하던 시기에 다른 나라의 식문화를 대하게 된 변화가 보인다. 문화가 특히 민간에서 어떤 식으로 융합하고 변화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무라이 겐사이는 메이지 시대의 천재 문인이다. 어려서 다양한 외국어와 지식을 교육받았고 12세에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우울증 등으로 중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 돌아와 1년 동안 연재한 『식도락』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막대한 인세를 벌었고,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 과일, 채소, 동물을 기르며 자급자족했다.

소설은 남녀 한 쌍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순박한 시골뜨기 먹보 청년 오하라, 똑똑하고 당차며 요리를 잘하는 아가씨 오토와다. 오토와가 대부분의 요리를 소개하면서 스토리가 이어진다. 박진아는 “여주인공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고 했다. “혼자 요리를 공부하고, 뛰어난 지식으로 남성들을 가르친다. 또 원치 않는 결혼을 할 바에는 요리 교실을 열어 자립하겠다고 하는 인물로, 비참할 정도로 낮았던 메이지 시대 여성들의 지위에 비춰봤을 때 인상 깊은 인물이다.”『식도락』의 ‘가을’ 편은 내년 출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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