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지휘자 자리 준다는데 "왜요?"…세계 홀린 당돌한 한국인

중앙일보

입력 2021.11.29 05:00

업데이트 2021.11.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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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창단 98년 만에 여성 최초로 미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 상임 음악감독이 된 김은선 지휘자. 세계 주요 오페라단 음악감독을 맡은 한국인은 정명훈(19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 이어 두 번째다. 사진 김태환

창단 98년 만에 여성 최초로 미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 상임 음악감독이 된 김은선 지휘자. 세계 주요 오페라단 음악감독을 맡은 한국인은 정명훈(19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 이어 두 번째다. 사진 김태환

 “제가 국적이나 성별을 정한 건 아니잖아요. 그냥 제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저를 보고 동기부여가 된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감사할 일이죠.”

세계 최고 오페라단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오페라(SFO)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김은선(41)은 여전히 얼떨떨하단다. “난 항상 김은선이었고, 달라진 게 없다”면서다. 세계 언론은 2019년 12월, SFO 차기 음악감독 김은선에 대해 ‘오페라의 새 역사를 썼다’고 대서특필했다. 김 감독은 지난 8월 SFO에 취임한 후 지난 6일 음악인들의 또다른 꿈의 무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메트)까지 데뷔했다. 지난 22일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

통역사 꿈꾸던 고등학생, 세계 최고 지휘자로  

2019년 12월 5일 샌프란시스코오페라단 차기 음악감독 내정 발표 당시 매튜 실벅(왼쪽) 총감독과 김은선. 사진 매튜 워시번

2019년 12월 5일 샌프란시스코오페라단 차기 음악감독 내정 발표 당시 매튜 실벅(왼쪽) 총감독과 김은선. 사진 매튜 워시번

“저를요? 왜요?” 지휘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SFO 음악감독직을 제안받은 자리에서 김은선의 첫 마디였다. 2019년 6월 SFO와의 첫 공연 직후 매튜 실벅 총감독의 연락을 받고 함께 한 점심 자리에서다. 실벅은 “다른 지휘자들은 하고 싶어 안달인데 당신 같은 사람은 없었다”고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당시는 SFO가 차기 음악감독을 물색하던 때로, 그해 공연은 사실상 오디션 격이었다. 김은선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 실벅은 김은선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김 감독은 “공연 한 번 보고 나한테 5년(계약기간)을 맡길 만큼 확신이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었다고 했다.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왜냐고 물어보면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잖나. SFO와는 첫 연습부터 잘 맞았다”면서다. 그날부터 그는 취임 준비를 시작했지만, 내정 사실은 그해 12월 발표 전까지 SFO 내에서도 극비였다고 한다. 김은선을 호텔에 숨기면서까지 감행한 ‘깜짝’ 발표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공연은 연일 수천 석이 매진이다.

2019년 캘거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공연 중인 김은선. 사진 Grey Mac Kay

2019년 캘거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공연 중인 김은선. 사진 Grey Mac Kay

독일 유학 후 유럽에서부터 승승장구해온 김은선이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그의 어릴 때 꿈은 통역사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절대음감까지 갖췄지만, 무대 울렁증 탓에 음악인은 꿈도 안 꿨다. “피아노가 힘들면 작곡과를 가지그래?” 고등학교 1학년 그의 피아노 실력을 알게 된 선생님의 한마디가 그의 진로를 틀게 했다.

“공부 상상 못 할 만큼” 6개 국어 구사 

독일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과 공연 중인 김은선. 사진 Daniel Delang

독일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과 공연 중인 김은선. 사진 Daniel Delang

인생의 터닝포인트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멘토도 있었다. 그를 지휘로 이끈 은사는 최승한 교수다. 최 교수는 지휘법을 수강하던 연세대 작곡과 4학년 김은선에게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A+를 줬다. 김은선은 그러나 “대학원에서 지휘를 배워보라”는 최 교수의 제안에 당돌하게도 “선생님은 왜 지휘를 선택하셨어요?”라고 물었다. “작곡은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지휘는 젊을 때 시작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유학을 미루고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휘자로서의 삶은 의외로 순탄했다. 독일 슈튜트가르트 음대에 재학 중이던 2008년 스페인 헤수스 로페스 코소브 국제오페라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투표로 우승자를 선발하는 콩쿠르로, ‘단원이 직접 뽑은 지휘자’가 됐다. 스페인어 한마디 모르던 독일 유학생이 지휘봉만 흔들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는 걸 보고 “지휘자로 먹고살 순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승 포상으로 1858년 이후 테아트로 레알(스페인 왕립오페라극장)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가 됐다.

물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공부를 많이 한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스페인에서도 1년간은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그 덕분에 지금은 독일어와 스페인어 등 6개 국어를 구사한다. “음악은 말에서 나오잖아요. 내가 작곡가의 말을 모르면 음악도 100%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오케스트라와 소통할 때 그 나라 말을 쓰면 연결고리도 탄탄해지죠. 외국 기자들한테도 그래요. 당신처럼 생긴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국악 한다고 하면 ’한국어는 할 줄 아나‘, ’한(恨)이 뭔지는 아나‘, ’우리 역사는 아나‘ 나도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고요.”

“상처? 젊은 지휘자라면 누구나 겪을 일”

지난해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콘서트 총감독을 맡았던 김은선. 에펠탑 아래에서 열리는 프랑스의 연중 최대 음악 행사로, 지난해엔 팬데믹으로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됐다. 사진 Christophe Abramowitz

지난해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콘서트 총감독을 맡았던 김은선. 에펠탑 아래에서 열리는 프랑스의 연중 최대 음악 행사로, 지난해엔 팬데믹으로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됐다. 사진 Christophe Abramowitz

그러던 그가 “내가 지휘하면 절대 안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김은선이 2011년 프랑스 리옹 오페라에서 키릴 페트렌코(베를린 필하모닉 수석지휘자)의 보조지휘자로 있었을 때다. 김 감독은 “그의 공연 전반과 곡에 대한 연구와 해석, 열정과 체력까지 너무 충격적이었다”며 “지금은 ‘네가 나한테 배워서 그만큼 컸다’고 농담을 나누는 편한 사이지만, 그땐 거기 있는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고 했다. 다른 오디션에서 김은선에게 “재능이 있다. 내 리허설은 항상 열려 있으니 언제든 오라”고 하던, 몇 년 후 “킴(김은선)이 폭풍 성장했다”는 단원의 전화를 받고 김은선의 연습실을 남몰래 다녀갔던 다니엘 바렌보임(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지휘자) 역시 그의 멘토다.

세계 최정상에 오른 김은선이지만, 그에겐 여전히 ‘아시아’,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겪은 적은 없다”는 김은선이지만, 사실 상처받을 일도 잘 넘기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덕분이기도 하다. “상처가 왜 없었겠어요. 어린 동양 여자애가 와서 지휘하니까 ‘목소리도 잘 안 들린다’부터 ‘곡 해석 잘못한 거 아니냐’ 등 딴지 거는 일 많았죠. 그런데 아시안, 여성이 아니라 젊은 지휘자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거든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선물. 김은선의 가장 소중한 멘토이자 롤모델은 “큰 사람이 되려면 자잘한 일에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던 아버지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짓고 서예가인 외할아버지 원곡 김기승이 써준 글 ‘아름답게 사는 길’은 김은선이 평생 벽에 걸어두고 마음에 새겼다고. 그는 “아버지가 하루 3~4시간 이상 주무신 걸 본 적 없다”고 했다. [사진 본인제공]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선물. 김은선의 가장 소중한 멘토이자 롤모델은 “큰 사람이 되려면 자잘한 일에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던 아버지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짓고 서예가인 외할아버지 원곡 김기승이 써준 글 ‘아름답게 사는 길’은 김은선이 평생 벽에 걸어두고 마음에 새겼다고. 그는 “아버지가 하루 3~4시간 이상 주무신 걸 본 적 없다”고 했다. [사진 본인제공]

늘 “현재를 열심히 살자”는 김은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당장 오를 무대다. 포부라면 수식어가 필요 없는 ‘지휘자 김은선’이 되는 것. ‘여성’이란 꼬리표는 산부인과 전문의였던 외할머니와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2012년 손녀는 할머니 입원 소식에 이틀을 겨우 확보해 독일에서 단숨에 한국으로 달려오고, 할머니는 의식이 없는 중에도 막내 손녀딸 손을 잡자 미소를 보일 정도로 둘 사이는 각별했다. “이제 여의사, 여선생님이라고 하지 않잖아요. 사회의 흐름이라는 게 있고 직업에 따라 그 속도가 다른 것 같아요. 시간이 필요한 일이죠.”

한국보다 해외에서 훨씬 유명한 한국인 김은선은 마지막으로 한국에선 언제 공연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 가야죠. 어떻게 좀 해주세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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