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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선

시인 김수영의 8인용 테이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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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울 도봉구 방학동 김수영문학관 2층에 있는 8인용 테이블. 시인이 생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식탁이다. 식탁 뒤편 벽면에 시인의 좌우명 '상주사심(常住死心)'이 보인다. 박정호 기자

서울 도봉구 방학동 김수영문학관 2층에 있는 8인용 테이블. 시인이 생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식탁이다. 식탁 뒤편 벽면에 시인의 좌우명 '상주사심(常住死心)'이 보인다. 박정호 기자

문학관 2층에 올라가니 8인용 식탁이 눈에 띈다. 식탁 뒤 벽에는  ‘상주사심(常住死心)’ 네 글자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늘 죽을 각오로 살아라’는 시인의 좌우명이다. 시인은 뭐가 그리 절박했을까.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으로 무장한 충무공쯤 되는 것일까. 하지만 시인은 허망하게 떠났다. 1968년 6월 16일, 귀갓길 교통사고로 47년 짧은 삶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양복 주머니엔 소설가 뮤리엘 스파크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번역료가 들어 있었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다.

‘자유의 시인’ 김수영 탄생 100년

 유족들은 시인의 주검을 집에 모셨다. 서재에 있던 8인용 식탁을 마당에 내놓고, 그곳에 시인을 뉘였다. 시인의 작품 중에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가 있다. 테이블에 걸리고, 의자에 걸리고, 스탠드가 울리고, 피아노가 울려서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돌음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기꺼이 기꺼이 변해 가고 있다’고 슬퍼했다.

 소설가 최정희의 회고다. “(시인은) 부인이 사들이는 책장, 책상, 식탁, 의자 등을 지겨워했다. (술에) 취하는 때는 도끼로 찍어버리겠다고 달려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시인 김응교는 이렇게 풀었다. “부인이 들여놓는 물건이 시인에게는 불편했다. 부족하지 않은 살림이었는데 새로운 물건은 그를 옥죄었다. 비싼 물건들이 자신을 물질의 노예로 만든다고 생각했을까.”

 인간은 모순적이다.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아내가 들여놓은 식탁에서 읽고, 쓰고, 번역했다. 또 그가 완성한 시를 읊으면 아내가 받아적었다. 테이블은 창작의 텃밭이었다. “시를 쓸 때는 동편으로 향해 앉았고, 에세이를 쓸 땐 북쪽으로, 번역인 경우에는 남으로 향해 앉았다고 한다.”(최정희)

김수영의 생전 모습. [중앙포토]

김수영의 생전 모습. [중앙포토]

 여기서 시인은 김수영(1921~68)이다. 지난 27일 탄생 100년을 맞았다. 시인의 자취를 찾아 서울 방학동 김수영문학관에 갔다. 그의 본가 인근의 문화센터를 리모델링해  2013년 11월 27일 개관한 곳이다. 김수영의 행적이 담긴 64곳을 순례한 홍기원은 신간 『길 위의 김수영』의 마침표를 이곳에서 찍었다. “모든 것을 바쳐 죽을 각오로 시를 썼던 김수영의 시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 했다.

표현의 자유를 향한 끝없는 열정 

 시인의 육필 원고와 주요 작품을 둘러봤다. 대표작이자 유작인 ‘풀’의 영상물도 감상했다. 파란 하늘 아래 흔들리는 풀밭 풍경이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구절에서 군사정권 시절의 독자들은 독재에 맞서는 민중의 저항을 떠올렸지만 최근에는 그 해석이 보다 넓어지고 있다. ‘인간과 세계가 합일된 상태’(문학평론가 이영준), ‘강렬한 생명력과 삶의 역동성’(문학평론가 고봉준) 등이다. 바람과 풀의 이항 대립을 넘어설 만큼 이제 우리 사회가 성숙한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문학관 1층 정경. 김수영의 대표작 '풀'을 소재로 한 영상물도 설치됐다. 박정호 기자

김수영문학관 1층 정경. 김수영의 대표작 '풀'을 소재로 한 영상물도 설치됐다. 박정호 기자

 탄생 100돌을 맞아 김수영 다시 보기가 활발하다. 권력과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넘어 인간과 자유에 대한 근원적 사랑이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아침에 깨어 보니 또 요에 오줌을 쌌구려”처럼 자신의 창피한 구석도 시로, 수필로 녹여낸 시인의 정직한 목소리가 주목받는다. 실제로 그는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도 서슴없이 드러냈다.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4·19와 5·16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은 김수영의 무기는 오직 시 하나였다. 그리고 우직하게, 정직하게 밀어붙였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고 설파했다. 김수영의 눈은 이 땅을 넘어 세계로 향해 있었다.

‘지옥’ ‘오징어게임’도 그 후예들 

 그 부끄러운 시간이 있었기에 요즘 우리 대중문화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시인은 압제의 시절에도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수많은 김수영 덕분에 ‘오징어 게임’과 ‘지옥’, 그리고 BTS의 영광도 가능했을 것으로 믿는다.  김응교 시인은 “더러운 전통에서도 희망을 찾은 김수영은 K문화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평했다.

 물론 그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김수영은 “창작의 자유는 100%의 언론 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도 1%가 결한 언론 자유는 언론 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라고 일갈했다. 최근 언론에 불편함을 느끼는 대선 후보들도 경청할 말이다. 시인이 ‘시여 침을 뱉어라’고 선언한 것도 이미 53년 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