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목숨 걸고 콜한다" 공포의 귀갓길 부른 英택시대란

중앙일보

입력 2021.11.27 05:00

영국 런던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 하는 에이미 메이 헤더는 매일 밤 늦은 귀갓길이 공포스럽다. 에이미는 “새벽 1시쯤 퇴근하면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요즘 잡는 게 쉽지 않아 길가에 오래 서 있게 된다”면서 “남성들의 '캣콜링'(휘파람을 불거나 추파를 던지는 행위)에 시달린다. 무턱대고 말을 걸어오면 정말 무섭다”고 털어놨다.

클럽 DJ인 레베카 바스먼트도 퇴근 길이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택시를 잡기 위해 길에서 한참을 서 있기 일쑤인데, 술 취한 남성들이 종종 접근하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택시가 부족한 지금 상황이 재난처럼 느껴진다”고 털어놨다.

런던의 명물 '블랙캡'이 길가에 늘어서있는 모습. 가디언에 따르면 작년 런던에서 코로나 여파로 블랙캡 5000여 대가 반납, 폐기, 판매됐다. [EPA=연합뉴스]

런던의 명물 '블랙캡'이 길가에 늘어서있는 모습. 가디언에 따르면 작년 런던에서 코로나 여파로 블랙캡 5000여 대가 반납, 폐기, 판매됐다. [EPA=연합뉴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런던 등 도심에서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된 코로나19 시대 ‘택시 대란’ 현상을 조명했다. 지난 7월 19일 일찌감치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며 일상 회복을 시도하는 영국에서 벌어진 새로운 문제라면서다.

무엇보다 심야택시 부족으로 여성들이 귀갓길 안전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 현지 언론이 만난 또다른 여성 진 님모 스미스는 “평소 우버 택시로 8파운드(한화 약 1만 원)면 될 거리를 40파운드(약 6만 원)가량의 웃돈을 주고 가야했다”고 털어놨다. “여성에게 택시는 생명줄로 여겨진다”는 게 가디언의 진단이다.

이 같은 ‘택시 대란’은 영국 내 ‘위드 코로나’ 이후 급증한 택시 수요를 공급이 따르지 못하는 게 크다. 코로나19 봉쇄 조치에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영향까지 더해지며 택시 시장에서 빠져나간 운전 기사 인력들이 채워지지 않았다.

차량 공유 서비스인 우버 택시로 생계를 이어온 운전기사들은 코로나19 봉쇄 기간에 배달 등 다른 업계로 이탈했다. 또 올해 초 브렉시트가 발효돼 불확실성이 커지자 우버 기사로 일하던 이주민이 영국을 떠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택시ㆍ렌터카 협회(LPHCA)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 30만 명이던 업계 인력은 지난 달 기준 16만 명 수준으로 반토막 났다.

지난 10월 7일 런던, "더 이상은 안 된다(Enough is Enough!)"라고 적힌 여성 실루엣 옆에 서 있는 활동가의 모습. 현직 경찰관이 여성을 살해하는 등 여성 대상 범죄가 거듭 발생하자 영국 전역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AFP=연합뉴스] 〉

지난 10월 7일 런던, "더 이상은 안 된다(Enough is Enough!)"라고 적힌 여성 실루엣 옆에 서 있는 활동가의 모습. 현직 경찰관이 여성을 살해하는 등 여성 대상 범죄가 거듭 발생하자 영국 전역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AFP=연합뉴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택시를 3시간 넘게 기다리는 일이 벌어지고, 택시를 잡지 못한 이들이 택시를 향해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폭력 사태가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여성들이 선호하는 택시는 ‘블랙 캡’으로 불리는 런던 택시다. 블랙 캡은 운전 기사들이 범죄 기록 조회, 건강 검진을 거쳐 필기·구술 시험까지 봐야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 안전에 대한 우려가 적은 편이다. 우버 택시는 통상 블랙 캡보다 요금이 30~50% 저렴한 것이 장점이다. 다만 개인이 등록만 하면 운행이 가능해 안전 우려가 제기돼왔지만, 우버 측은 지난해 9월 운전 기사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해 런던 법원으로부터 영업면허 갱신 허가를 받았다.

‘택시 대란’에서 여성들의 불안감이 더 큰 것은 올 들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노상 강력 범죄가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BBC는 짚었다.

'튜브'라고 불리는 런던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 런던 나이트 튜브(야간 지하철) 운행은 코로나19가 본격화한 2020년 3월 이후 운행이 중단됐다. [REUTERS=연합뉴스]

'튜브'라고 불리는 런던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 런던 나이트 튜브(야간 지하철) 운행은 코로나19가 본격화한 2020년 3월 이후 운행이 중단됐다. [REUTERS=연합뉴스]

지난 3월 마케팅 전문가인 사라 에버라드(당시 33세)가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오는 길에 납치, 강간 살해 당한 사건이 영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에버라드는 심야 시간에 걸어서 집에 오다가 변을 당했다. 현직 경찰관 신분의 범인 웨인 쿠젠스는 에버라드가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어겼다”며 수갑을 채워 끌고 가 범행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9월에는 20대 교사 사비나 네사가 집에서 5분 거리 맥줏집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자택을 나섰다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역시 심야 시간 노상에서 발생한 강력 범죄였다. 지난 달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여성의 49%는 “혼잡한 공공장소에서 혼자 걸을 때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다.

귀갓길 안전 문제를 호소하는 여성들이 늘면서 코로나19 이후 중단된 ‘나이트 튜브(심야 지하철)’ 운행을 재개하라는 청원도 지난 달 등장했다.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이 요구를 받아들여 11월 말부터 운행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철도해양교통노조(RMT)가 나이트 튜브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예고한 상황이어서 예정대로 운행이 재개될 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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