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 "중고차 대출 사기, 금융기관에도 책임"…피해자가 이겼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27 05:00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시내 한 중고차시장에 판매를 위한 중고차들이 주차돼 있다. 뉴스1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시내 한 중고차시장에 판매를 위한 중고차들이 주차돼 있다. 뉴스1

“원고와 피고 현대캐피탈 사이에 체결된 대출약정은 무효다.”
중고차 대출 금융사기 피해자인 박모(44)씨가 최근 1심 법원에서 받은 판결 내용이다. 지인에게 속아 명의를 빌려줬다가 중고차 대출 사기에 휘말린 박씨의 빚 8000만원을 대출을 승인한 캐피탈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온 것이다. 본인 확인을 허술하게 한 금융기관의 책임을 인정한 이번 판결로 법조계에선 비슷한 사기 수법의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평이 나온다.

횡행하는 중고차 대출사기에 주목할 판결

중고차 대출 금융사기 구조. 부산경찰청 제공

중고차 대출 금융사기 구조. 부산경찰청 제공

서울중앙지법 민사93단독 김대원 판사는 지난달 22일 박씨가 하나은행과 현대캐피탈을 상대로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박씨는 지난 2019년 중고차 관련 사기에 휘말려 자신의 명의를 도용한 이들이 중고차 구입을 이유로 하나은행과 현대캐피탈에서 대출을 실행한 각각 5000만원과 8000만원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박씨가 당했던 사기는 최근까지 기승을 부리는 ‘중고차 대출 금융사기’로, 렌터카 사업으로 수익금과 할부금을 보장해준다는 명목으로 명의를 빌려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아 이를 가로채거나 고급수입차를 구매한 뒤 잠적하는 수법이다. 이러한 사기 수법이 횡행하자 지난 5월 금융감독원은 중고차 대출 금융사기에 대해 소비자경보 ‘주의’를 발령하기도 했다. 당시 금감원은 “금융사와 중고차 대출 계약을 진행할 경우 본인 명의로 체결된 모든 대출계약의 원리금 상환 의무는 본인에게 귀속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피해자가 8000만원 안 갚아도 되는 이유는?

법원 이미지 그래픽

법원 이미지 그래픽

박씨 역시 직장상사 A씨로부터 “중고차 대출을 받아 그 돈으로 구매한 외제차를 차량대여업을 하는 B씨에게 빌려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A와 B씨는 박씨 명의로 대출을 받아 산 차량을 빌리는 대가로 매월 50만원을 지급해주고 대출 원금과 이자도 갚아줄 것을 약속했다.

7년간 같은 부서에 근무한 직장상사 A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박씨는 그에게 휴대폰과 신분증을 맡겼다. A씨와 B씨는 박씨의 명의를 이용해 모바일 앱을 통해 하나은행과 현대캐피탈에서 각각 5000만원과 8000만원의 대출을 실행했다. 당시 대출금은 박씨의 계좌가 아닌 중고차 판매업체 계좌로 바로 이체됐다. 이후 A씨와 B씨가 대출금 상환을 하지 않으면서 1억3000만원의 빚은 온전히 박씨가 떠안게 됐다.

法, “본인확인 소홀히 한 금융기관도 책임 있다”

사기를 당한 박씨는 A씨와 B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해 승소했으나 피해액을 보상받지 못했다. 이들의 명의로 된 재산이 없어서다. 이후 박씨는 명의를 도용해 대출이 이뤄진 점에 대해 하나은행과 현대캐피탈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1심 재판부는 현대캐피탈에 한해 대출과정에 책임이 있다며 대출이 무효라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기본적으로 피고 현대캐피탈은 여신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금융회사로서 채무를 부담하게 될 당사자에게 직접 그 의사를 확인하는 등 보다 신중하게 대출을 실행해야 할 주의의무가 있다”며 “영업의 편의를 위해 그 절차를 간이하게 해 발생하는 위험은 원칙적으로 피고가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에 따르면 현대캐피탈은 대출약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운전면허증 번호를 입력하고 휴대폰으로 전송한 링크를 통한 휴대전화 본인인증만 하게 했을 뿐이었다.

금융기관과 체결한 대출약정 자체에 “무효”

아울러 ‘중고 자동차 대출 표준약관’(표준약관)에 명시된 “금융회사가 대출금을 채무자 본인 계좌로 입금하지 아니한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채무자의 손실은 모두 금융회사가 배상한다”는 규정도 현대캐피탈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현대캐피탈이 박씨 명의로 이뤄진 대출금을 그의 계좌가 아닌 중고차 판매업체에 바로 이체했기 때문이다.

다만 재판부는 동일하게 제3자의 계좌로 대출금을 이체한 하나은행에 대해선 “여신전문금융업자에게만 해당되는 표준약관은 시중은행인 하나은행에 적용될 수 없다”며 “박씨와 하나은행 사이에 체결된 대출약정은 유효하다”고 판시했다.

“명의 도용 피해자들 구제 가능성 커져”

법봉 이미지그래픽

법봉 이미지그래픽

김병언 변호사(법무법인 폴라리스)는 “그간 법원에서 금융기관의 본인확인 의무 위반으로 대출계약 무효를 인정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며 “명의대여와 도용 등으로 유사한 중고차 대출 금융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본인확인을 소홀히 한 금융기관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다만 김 변호사는 “금융기관 형태에 따라 중고차 대출 약관의 적용을 달리한 법원의 판단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캐피탈은 이번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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