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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생노병사고’ 공직자들이 있으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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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4호 35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생로병사고(生老病死苦) 재상’이란 말이 있었다. 중국 북송의 신종(神宗) 때 일이다. 당시 황제를 보좌하는 재상과 부재상이 다섯 명이나 됐다. 황제의 나이가 어린 데다, 심각한 외교 안보와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한림학사 왕안석만 의욕적으로 나설 뿐, 나머지 넷은 뒷짐만 지고 일을 하지 않았다.

재상 증공량은 고령임을 내세워 거드름만 피웠고, 부필은 병을 핑계로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았다. 당개는 관직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고, 조변은 매사에 몸을 사리며 엄살을 피웠다.

도망가는 경찰관들 만든 건
자기 일 안하는 고위공직자
묵묵히 할 일 하는 국민까지
권력 촉수가 흐트려서 걱정

생로병사고란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네 가지 고통을 말하는 불교용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이 네 가지 고통에다 그냥 일반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다섯 고위관리를 보고 사람들이 생로병사고 재상이라 비웃었던 것이다.

당시 북송이 어디 그럴 상황이었나. 북방에서 침입하는 요와 서하를 재물로 달래느라 나라 곳간에 구멍이 뚫렸다. 굴욕적 조약으로 얻은 평화로 문화의 꽃을 피웠지만,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고 대지주·대상인의 횡포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선데이칼럼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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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의 신법이란 그런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려는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다른 재상·부재상들은 이를 ‘소 닭 보듯’ 했고, 조정은 신법당과구법당으로 나뉘어 싸움만 거듭했다. 그 사이 국력은 기울고, 황제와 상황(上皇)이 여진족에게 끌려가도 구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달아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재정난을 극복하고 백성을 보호해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왕안석의 개혁안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취지만 그럴듯할 뿐 허점과 모순이 많아 오히려 고리대와 부정부패가 늘어나는 부작용으로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위험에 빠진 국민을 놔두고 도망치는 경찰들을 보며 생뚱맞게도 생로병사고 재상이 떠오른 건 북송과 지금 우리의 사정이 사뭇 흡사한 까닭일 터다.

출범 초부터 입만 열면 개혁을 외치던 정부와 여당은 ‘주거 참사’와 ‘일자리 파괴’ 말고는 달리 내세울 성과가 없다. 이런 결과를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토록 말리던 주변 목소리들을 들은 척도 안 하던 오만한 아마추어리즘이 왕안석의 개혁을 닮았다.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인데 국민 봉기에 얹혀간 자들이 혁명세력처럼 굴며 허술한 계획을 밀어붙였으니 성공할 리 없다.

그래서 죽어나는 건 국민뿐이다. 천정부지 아파트값에 죽어나고, 그래서 오른 세금에 죽어나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싸우느라 죽어난다. 일자리가 없어서 죽어나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죽어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싸우느라 죽어난다.

그들이 가장 중점 뒀던 검찰 개혁은 결국 검찰을 ‘바보’로 만드는 계획이었다. 그들이 말하던 ‘검수완박’이 그거였다면 성공을 거둔 셈이다. 민간 개발업자들이 수천억원대 이익을 챙겼는데, 그것을 자신의 ‘최대 치적’이라고 자랑하던 당시 시장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검찰의 결론인 것 같다.

그야말로 바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인데, 수뇌부가 정작 할 일은 않고 딴생각만 하는 ‘생로병사고’다 보니 조직이 따라서 그리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법무장관이 세 번째 바뀌도록 바뀌지 않는 목표, ‘정권 재창출을 위한 노력 봉사’ 말이다. 그렇게 동원돼 무리를 거듭하다 나쁜X 때려잡는 것밖에 몰랐던 사람을 강력한 경쟁자로 만드는 아이러니를 낳았으면서도 말이다.

경찰은 처음부터 검찰을 견제하는 도구로 삼았으니 더 기대할 게 없었다. 수사권 독립의 요란한 팡파르 이후에도 경찰의 부실 수사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내사 사건 종결 과정에서 부실 수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실시한다는 자체점검 역시 하나마나다.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수사를 점검해 시정·재수사 등 8645건의 후속조치가 이뤄졌지만, 징계는 하나도 없고 주의·경고만 고작 4건이었다.

딴 생각하는생노병사고 수뇌부가 시늉만 하는 거다. 윗물이 그러하니 아랫물도 다를 수 없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생각 안 하고 제 안전이 우선인 ‘생노병사고’ 경찰관이 그래서 가능해진다. 수뇌부가 정권에 목매지 않고 국민 생명 보호에 헌신하는 경찰상을 보여왔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 말이다.

언감생심 헌신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할 일만 해주길 기대할 뿐이다. 공공기관의 수뇌부들이 권력 눈치를 안 보고 자기 할 일만 제대로 해도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되지는 않을 터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힘이었다. 굴곡진 현대사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네 권력자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권력 주변을 서성이는 무리는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이 나라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온 국민들 덕이었다. 지금 이 나라가 휘청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것도 그런 권력 밖 국민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수록 교활해지는 권력의 촉수가 점점 더 그런 국민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니 문제인 거다. 편 가르고 싸움 붙여 국민들의 평정한 마음을 흐트리는데 생노병사고 공직자들이 막을 생각없이 따를 뿐이니 안타깝고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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