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경지 전바오다오 유혈사태 풀자” 중·소 총리 전격 협상

중앙선데이

입력 2021.11.2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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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4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4〉

코시킨(앞줄 왼쪽 여섯째)은 1965년 2월 5일부터 1주일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유리 안드로포프(앞줄 오른쪽 여섯째)와 함께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에게 전바오다오가 중국 영토임을 확인시킨 적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코시킨(앞줄 왼쪽 여섯째)은 1965년 2월 5일부터 1주일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유리 안드로포프(앞줄 오른쪽 여섯째)와 함께 중국을 방문, 마오쩌둥에게 전바오다오가 중국 영토임을 확인시킨 적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1960년대 중엽, 소련은 전략무기 개발에 매진했다. 1969년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미국에 접근할 정도였다. 1965년에서 69년까지 미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854개에서 1054개로 증가한 반면 소련은 270개에서 1050개로 늘어났다. 1년 후 소련이 1300개로 급증해도 미국의 보유량은 변함이 없었다. 월남전도 골칫거리였다. 812억 달러를 쏟아부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염증을 낸 평화요구와 반전시위가 그칠 날이 없었다. 경제문제도 심각했다. 1968년에 4%였던 통화팽창률이 69년 5.6%, 70년엔 6.5%까지 상승했다.

소련 ICBM 보유량 미국 추월  

1969년 9월 11일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앞줄 오른쪽 첫째)와 회담을 마친 코시킨(앞줄 가운데). [사진 김명호]

1969년 9월 11일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앞줄 오른쪽 첫째)와 회담을 마친 코시킨(앞줄 가운데). [사진 김명호]

문혁의 소용돌이에 빠진 중국도 난장판이었다. 세계혁명이라는 황당한 관념에서 출발한 혁명이다 보니 “제국주의 타도, 현대수정주의 타도, 각국 반동파 타도”가 기본 구호였다. 홍위병들이 인도, 버마, 인도네시아 대사관을 때려 부수고 영국 대사관 격인 베이징주재 연락 사무소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파장이 컸다. 수교를 맺은 40여 개국 중 30개국과 분규가 그치지 않았다. 단교를 선언한 국가도 한둘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이 “현재 우리는 고립됐다. 우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고 통탄할 정도였다. 1969년 5월 1일 노동절, 외국 사절들 만난 자리에서 관계회복과 대사 파견을 통보했다. 적도기니, 남예멘, 칠레, 캐나다, 이탈리아 등과 외교관계를 수립해 국제사회에 체면이 섰다.

국제환경이 호전돼도 소련과 미국과의 관계는 낙관적이지 않았다. 60년대 초 소련과 이념논쟁이 벌어진 이래 소련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강경일변도였다.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가 중국을 “세계혁명운동의 적”이라며 깎아내렸다. 마오쩌둥은 단순한 필전(筆戰)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예상이 적중했다. 1969년 3월, 소련이 “유한주권론(有限主權論)”을 주장하며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미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같은 해 7월 21일, 미국 시민의 중국여행과 중국 물품구입 제한을 방관한다고 선언했다. 3일 후 중국도 화답했다. 불법으로 월경(越境)한 두 명의 미국인을 풀어줬다. 아시아 순방길에 오른 닉슨의 발언도 주목을 끌었다. “미국은 소련이 제의한 아시아 집단안전체제 건립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어떤 조직에도 참여할 계획이 없다.”

우수리강의 작은 섬 전바오다오, 왼쪽이 중국. [사진 김명호]

우수리강의 작은 섬 전바오다오, 왼쪽이 중국. [사진 김명호]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9월 3일 새벽, 월남민주공화국(월맹) 주석 호찌민이 하노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월맹은 중·소 양국과 우의가 돈독했다. 소련이 수상 코시킨의 조문과 영결식 참석을 발표하자 서구 언론이 베이징을 주시했다. 신화통신이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하노이 파견을 발표하자 코시킨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눌지 온갖 예측이 난무했다. 9월 4일 하노이에 도착한 저우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청년 시절 프랑스에서 처음 만나 수십 년간 우의가 지속된 호찌민의 영전에 20분간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 숙였다. 월맹의 실질적인 지도자 레주언과 수상 팜반동에게 조문 표한 후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코시킨과는 만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9월 9일에 열릴 영결식 참석은 부총리 리셴넨(李先念·이선념)을 단장으로 대표단을 따로 꾸렸다. 저우를 만나지 못한 코시킨은 리와의 대화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마오 결단으로 코시킨 방중

1969년 겨울, 전바오다오를 수비 중인 중국 변방군의 훈련 모습. [사진 김명호]

1969년 겨울, 전바오다오를 수비 중인 중국 변방군의 훈련 모습. [사진 김명호]

소련 측이 팜반동에게 부탁했다. “귀국길에 베이징을 경유하고 싶다. 중국 측에 통보해주기 바란다. 소련 대표단 통역이 구술을 남겼다. "코시킨은 온건파였다. 중국과의 무력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 연락 오기를 기다렸지만 팜반동에게 걸었던 기대도 허사였다. 귀국길에 올랐다. 타지키스탄 수도 두샨베에 도착해 늦은 저녁 먹던 중 코시킨에게 전화가 왔다. ‘중국이 소련 항공기의 중국 상공 경유를 허락했다. 저우언라이가 베이징 공항에서 코시킨 수상과 만나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코시킨은 일행 중 다섯 명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다.” 중국 측 기록도 소개한다. "팜반동의 연락을 받고 중앙 정치국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코시킨을 만나지 말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결과를 보고받은 마오는 심사(深思)와 숙고(熟考)를 반복했다. 코시킨의 접대를 비준하며 강조했다. ‘양국 총리들끼리 공항에서 만나라’. 코시킨은 시베리아를 경유해 베이징으로 왔다.”

9월 11일 오전,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코시킨은 저우언라이와 3시간40분간 회담했다. 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4년 전 코시킨의 중국방문을 회상했다. "당시 우리는 이념 논쟁으로 서로를 모욕하고 매도할 때였다. 코시킨 동지가 마오 주석에게 논쟁이 언제 끝날 것 같냐고 물었다. 주석은 만 년이 지나야 끝난다. 오늘 코시킨 동지를 보니 천 년으로 줄어들었다며 기뻐했다. 지금 주석은 더 당겨지기를 기대한다. 우리 변방군이 소련을 공격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중이다. 전쟁을 일으킬 겨를이 없다. 핵무기 수준도 초보 단계다. 우리의 핵기지 공격은 침략이다. 끝까지 저항할 준비가 되어있다. 변방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코시킨도 소련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간 논쟁이 모욕으로 변하고,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주고받았다. 관계가 단절되고 분노가 극에 달해 무력충돌까지 발생했다. 긴장 관계 소멸은 빠를수록 좋다.”저우언라이와 코시킨은 양국 관원들끼리 회담을 진행하자고 합의했다. 의제가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사태가 묘하게 전개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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