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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물유전자원 26만 개 보유, 세계 5위 ‘종자 강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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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4호 10면

[SPECIAL REPORT]
K-농업, 식량 위기 해결 씨앗 뿌리다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종자은행의 중기저장고 내부. 이곳에는 약 24만 개의 식물종자가 보관되어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종자은행의 중기저장고 내부. 이곳에는 약 24만 개의 식물종자가 보관되어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던 요소가 이런 대란을 낳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죠.”

지난달 중국 정부의 수출 통제로부터 시작된 요소 대란은 국내 물류 시장 전반에 큰 파장을 가져왔다. 물류 공급망이 국가안보와도 직결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태였다. 코로나19가 불러온 국제 물류 시스템의 불확실성과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 축소는 비단 요소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엔 우리 밥상도 위협당할지 모른다고 전망한다. 지난 9일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식품가격지수는 2011년 이후 10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식량 안보와 이를 뒷받침하는 종자 보존·확보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매년 1000개 신규 종자 자원 입고

지난 18일 방문한 전북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에 위치한 종자은행의 중기저장고 내부는 10분만 서 있어도 싸늘한 느낌이 감돌았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오가는 연구원들은 입고된 종자를 고유번호에 맞춰 진열하고, 수시로 점검을 반복했다. 이곳에는 매년 약 1천 개의 신규 자원이 입고되고, 약 2만 개의 자원이 센터 밖으로 분양된다. 이주희 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장은 “박물관에 보존된 유물들은 모두 죽어있지만, 이곳 종자은행에 보존된 자원들은 살아있는 유산”이라며 “유전자원을 안전하게 보존해 후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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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식량 대란을 막기 위해 세계 각국은 총성 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식량자원의 수요에 맞춰 시시각각 활용할 수 있도록 ‘금보다 비싼’ 농업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농촌진흥청의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유전자원센터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농업유전자원센터는 유전자원의 수집·분류·보존·증식·분양·특성평가 등 국내외 유전자원 관리에 필요한 업무를 총괄한다. 각 자원의 특성을 평가·활용하고, 수요에 따라 자원을 분양하는 일종의 은행인 셈이다.

세계 각지에서 확보된 종자는 발아 테스트를 거쳐 특성을 파악하고, 품종에 따라 중기저장고(4℃, 30년)와 장기저장고(-20℃, 100년)에, 영양체와 DNA는 초저온 동결기술을 활용한 특수저장고(-196℃)에 보존된다. 후대에 물려줄 ‘종자보험’을 들어두는 것이다.

후대에 물려줄 ‘종자 보험’ 드는 것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우리나라는 약 26만 개의 식물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원 강국 중 하나다. 지난 1월 국가별 식물유전자원 보유현황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일본, 독일 등을 제치고 5위에 올랐다. 100년 이상의 자원수집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러시아와 비교해도 작지 않은 규모다. 보존 시설도 수준급이다. 농업유전자원센터가 수집한 자원은 지진 규모 7의 강도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된 종자은행 2곳(전주, 수원)과 경북 봉화의 시드볼트에 중복 보존돼 유사시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 2008년과 2020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저장고인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아시아 국가 최초로 토종종자를 기탁해 국내외 모두 4곳에 중복 보존체계를 구축한 상태다.

2008년 세계안전중복보존소로 지정된 농업유전자원센터 종자은행은 현재 세계채소센터(World Vegetable Center)를 비롯하여 10개국의 2만 자원 가량을 무상으로 보존하며 K-농업의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식량을 원조받던 나라에서 식량 종자를 무상으로 보존해주는 나라로의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세계채소센터 마르텐 반 조네벨트 유전자원센터 매니저는 “한국 종자은행은 장기 보존이 가능한 이중보관시설을 보유하고 있어 종자 보존에 탁월한 곳”이라며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에 안전보존서비스를 수탁했다”고 전했다. 그는 “과거 화재나 전쟁으로 인해 유전자보존센터가 파괴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자원을 중복 보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며 “앞으로도 농업유전자원센터와 지속해서 협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K-농업 열풍이 전 세계로 확산하자 농업기술의 근간인 종자를 활용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 국가도 많다. 지난달 29일에는 중미 7개국(파나마, 도미니카공화국, 벨리즈,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외교부 차관 일행이 “한국의 선진농업 기술을 도입하고 싶다”며 농업유전자원센터를 방문했다. 통상 외국 정부 고위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반도체 등 첨단기술 현장을 견학하는 것과 달랐다. 당시 코스타리카 외교부 차관은 센터를 돌아보며 “한국 농촌진흥청의 도움을 받아 커피, 벼, 강낭콩과 관련된 과제를 추진할 수 있었다”며 “코스타리카에도 유전자원센터를 설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관심을 표현했다.

케이팝(K-pop), 케이푸드(K-food) 열풍에 힘입어 K-종자 제공을 요청하는 곳도 하나둘씩 늘어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재배되는 들깨, 삼겹살에 싸 먹을 때 제격인 잎상추, 한국이 원산지인 콩이 대표적이다. 이 품종들은 한국 토종 종자이기 때문에 국외 반출이 어려워 한국에서 종자를 분양받지 않는 한 구하기가 어렵다. 이주희 센터장은 “BTS가 먹는 한국 음식을 보고 같은 재료를 구하려는 외국인들이 많아지자 덩달아 종자 분양 요청도 늘어난다”며 “우리 토종 종자에 대한 해외 수요가 높아져 가능 범위 내에서 종자를 교환하는 등의 협약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남군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농업유전자원센터에서 확보한 자원들로 흰잎마름병에 강한 벼처럼 우수한 품종을 개발하는데 활용하고 있다”며 “산업체가 상품화한 종자를 재배해 해외에 수출하는 등 K-종자가 우리 농업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 센터장은 “한 나라의 유전자원은 국력과 비례하는 만큼 종자 주권은 확보하되 통일벼 등 품종 보호 대상 작물에서 제외된 품종들은 저개발국 등 필요한 국가들에 기꺼이 나눌 것”이라며 “기후변화, 식량난 등 위기상황이 찾아올 때 K-종자가 국가 핵심자원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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