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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화분을 웃는 얼굴로…긍정바이러스 넘치는 경비 아저씨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29)

나무는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지만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곱던 단풍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낙엽이 되면 청소하는 분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낙엽으로 주민들에게 즐거움과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다.

아파트 놀이터에 모아 놓은 은행잎을 흩뿌리며 흥겹게 놀고 있는 어린이들. [사진 조남대]

아파트 놀이터에 모아 놓은 은행잎을 흩뿌리며 흥겹게 놀고 있는 어린이들. [사진 조남대]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 두 분은 하루씩 교대로 근무한다. 한 분은 70대 중반이신데 10년 이상 근무했다. 이 분은 무뚝뚝해 웃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일이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성격 탓인지 주민들하고 가끔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그래도 겉보기와는 달리 다정한 행동을 보일 때도 있다. 한번은 늦은 시간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어두울 때까지 놀면 어떡해”라며 엄마들을 움찔하게 했는데, 조금 있다가 근처 작은 조명을 놀이터 쪽으로 힘들게 돌려놓았다. 말은 무뚝뚝해도 마음은 다정한 분이구나 생각했다.

다른 한 분은 조용조용하고 말도 별로 없지만 친절하고 항상 웃는 인상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분이 그만두고 후임자들이 2∼3일을 버티지 못하고 나오지 않는다. 어떨 때는 후임자를 구하지 못해 며칠 동안 아예 근무자가 없어 불편을 겪어야 했다. 처음에는 경력자가 오더니 나중에는 무경력자가 오기도 한다.

한 달가량 그런 식으로 여러 사람이 오갔다. 마침내 10년 이상 근무하던 분도 퇴직했다. ‘너무 업무량이 많은가’, ‘주민들이 힘들게 해서 그런가’하는 생각으로 슬슬 걱정되기 시작할 무렵 며칠 간격으로 두 분이 새로 들어와 지금껏 근무를 잘하고 있다. 너무 다행스럽다.

놀이터에서 놀고 난 다음 은행잎을 깨끗이 정리하는 주민. [사진 조남대]

놀이터에서 놀고 난 다음 은행잎을 깨끗이 정리하는 주민. [사진 조남대]

가을은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이 제일 바쁠 때다.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아름답던 단풍도 낙엽이 되면 귀찮은 존재가 된다. 온종일 낙엽과의 전쟁이다.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젖은 낙엽은 정말 쓸기가 어렵다. 30년 이상 지난 아파트다 보니 자동차가 지상에 주차되어 있어 그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낙엽 쓰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다.

어느 날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새로 오신 경비 아저씨가 어린이 놀이터 주변에 있는 은행나무잎을 꽃방석처럼 가장자리에 예쁘게 모아 놓은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큰 부대에 담아 놓았을 텐데, “애들이 은행잎을 던지고 놀면 좋을 것 같아서”라며 빙그레 웃는다.

그날 오후 어린이집을 다녀온 아이들이 하나둘 놀이터에 모여들었다. 놀이터 구석에 예쁘게 모여 있는 은행잎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른다. 눈을 던지며 눈싸움을 하듯이 낙엽을 하늘 높이 흩뿌리거나 던지며 한껏 즐긴다. 엄마들도 자녀들과 함께 은행잎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기도 하며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아파트에 메아리친다. 낙엽을 가지고 신나게 놀던 아이들도 집에 들어갈 때쯤 큰 빗자루를 들고 흩어져 있던 낙엽을 깨끗이 정리해 놓아 경비 아저씨의 선물에 보답했다. 한 분의 아이디어로 밝고 살맛 나는 아파트를 만든 것 같아 고맙기만 하다.

아파트 입구에 비치된 국화 화분은 오가는 주민들이 가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사진 조남대]

아파트 입구에 비치된 국화 화분은 오가는 주민들이 가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사진 조남대]

가을에 접어들자 아파트 입구에 커다랗고 예쁜 국화 화분 두 개가 놓였다. 처음엔 꽃봉오리 상태였는데 하루하루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도 했다. 어느 날 풍성한 국화꽃 위에 언뜻 느티나무 단풍 몇 잎이 떨어져 있는 듯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웃는 얼굴 모습을 만든 것이었다. 역시나 경비 아저씨 작품이었다. 은행잎 놀이터에 이어, 웃는 얼굴의 국화꽃 이벤트가 이어지자 주민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70대 초반의 남자 어르신의 감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며 칭찬이 쏟아졌다.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웃는 얼굴의 국화꽃 보며 출근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라며 겸연쩍어한다. 아침이면 오늘은 어떤 이벤트가 있을까 궁금해지고 기대가 된다.

국화 화분에 단풍잎으로 사람의 웃는 모습을 연출한 경비 아저씨의 작품. [사진 조남대]

국화 화분에 단풍잎으로 사람의 웃는 모습을 연출한 경비 아저씨의 작품. [사진 조남대]

아주머니들은 고구마나 옥수수같이 맛있는 것 있으면 수시로 경비실로 가져간다. 또 불편한 것 있으면 관리사무실보다는 먼저 경비 아저씨께 이야기한다.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사소한 것은 대부분 해결해준다.

어린이 놀이터에 충격을 완화하는 바닥재를 깔아 놓았는데 울퉁불퉁해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걸려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관리사무실에 여러 번 이야기해도 시정이 안 되었다. 새로 온 경비에게 이런 점을 말했더니 놀이터 주변 나무뿌리가 파고 들어와 바닥재를 불룩 튀어나오게 한 것이라 한다. 그러자 그 경비 아저씨는 옆 동 경비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바닥재를 걷고 톱으로 뿌리를 잘라낸 다음 땅을 골라 말끔히 고쳐 놓았다. “일하는 것이 힘드시지 않으냐”고 여쭤보았더니 “재미있고 운동도 많이 된다”며 아주 긍정적이다.

경비 아저씨들이 울퉁불퉁한 어린이 놀이터 바닥을 말끔히 수리해 놓은 모습. [사진 조남대]

경비 아저씨들이 울퉁불퉁한 어린이 놀이터 바닥을 말끔히 수리해 놓은 모습. [사진 조남대]

비록 처음 하는 일이지만 ‘어떻게 하면 주민들의 불편함을 덜어줄까’, ‘무엇으로 주민들을 기분 좋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아파트 1층 테이블에 국화꽃 몇 송이가 예쁜 양주병 2개에 꽂혀 있고 벽에는 작은 그림이 세워져 있었다. 1층 로비 분위기가 확 달라져 오가는 주민들의 기분까지 환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경비 아저씨와 눈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워 다른 쪽 보며 지나쳤는데 지금은 밝은 얼굴로 웃으며 인사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아파트 입구 현관 탁자 위에 그림과 양주병, 화분을 비치해놓으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진 조남대]

아파트 입구 현관 탁자 위에 그림과 양주병, 화분을 비치해놓으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진 조남대]

경비 아저씨가 새로 바뀐 얼마 후 우리 동 아파트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고, 엄마들이 아이들을 서로 돌보며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은 도심 속의 전원 같은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우리 주변에 이웃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더 밝은 사회가 될 것이다. 나도 이들을 본받아 긍정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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