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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찰수와 재명공자 "호랑이 초패왕보다 늑대의 왕 유방을 배우리라"[이정재의 대권무림 2부②]

중앙일보

입력

이정재의 정치풍자 무협판타지 대권무림 

〈2부 제 2화〉 파부침주(破釜沈舟) 지면 죽는다, 돌아갈 배는 없다.  

호랑이와 사자의 시대는 갔다. 대중검자와 공삼거사, 종필노사가 호령하던 강호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지금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개와 늑대가 우르르 패거리 지어 호랑이와 사자의 시체를 갈가리 뜯어먹는 세상이다. 패거리들은 살점 한 점 남기지 않는다. 다른 무리의 몫은 없다. 옳음과 정의와 공정이 남김없이 도륙되는 비정 강호다.

"이런 세상을 다시 호랑이와 사자의 시간으로 되돌리고 싶습니다."

백발자(白髮子) 한길공은 지난봄 나찰수와의 첫 만남을 그렇게 기억한다. 무림 초출의 백면서생 입에서 나온 말치곤 담대했다. 그때 내가 뭐랬던가.

"나는 검찰포두(捕頭)가 바로 무림지존이 되는 세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오. 다만 망군(亡君)의 세상은 끝내야 한다고 믿소. 당금 무림지존의 패거리들이 다시 차기 지존좌를 차지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뜻. 귀공이 아니면 누구도 그 일을 해낼 수 없다면, 그때는 내 귀공을 도와 천하 패업을 이루리라."

그 후 육 개월여. 다시 몇 차례의 만남이 있었고 마침내 나찰수 윤석열은 내 말빚의 청구서를 내밀었다.

"노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전권을 드릴 테니 전력을 주십시오."

깊은 고민 끝 대답은 "락(落)"이었다.

"세상 무인엔 두 종류가 있소. 협객(俠客)과 낭객(浪客)이요. 협객은 갓난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오. 귀공이 검찰에서만 26여개 성상을 지낸 것은 무림지존좌에는 단점이나, 협객으로선 장점이오. 낭객은 세상을 두루 익혀야 하오. 경험이 깊을수록 초식이 풍부해지고 변화무쌍해지는 법이니. 그 점에서 재명공자는 낭객의 으뜸이라 할 만하오. 하나 협객은 세상 무공을 다 배울 필요가 없소. 되레 경험이 얕을수록 그 무공이 더욱 진실하고 깊어지는 법이요."

나찰수 윤석열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런 그의 눈빛을 마주 보며 한길공은 힘주어 말했다.

"서양의 철인 니체는 '모든 무공 중에서 나는 피로 익힌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찰수야말로 진실로 피로 익힌 무공이 아니겠소."

나찰수는 귀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내 귀공에게 한마디 서툰 조언을 하리라. 초패왕은 호랑이였지만 늑대 떼의 우두머리 유방에게 패했소. 초 패왕 항우 말고 그를 물리친 유방이 되시오. "

유방은 어떻게 항우를 물리쳤나. 항우처럼 정통 절정 무공을 익히지 못한 유방은 대신 두 가지 기공에 집중했다. 흡입마공과 흡인공. 흡입마공이 세상의 모든 무공을 빨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마공이라면 흡인공은 세상의 모든 무인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마공이었다. 그는 이 둘을 자유자재, 적시적재에 사용해 마침내 천하제일 무력 항우를 꺾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당금 무림에 흡입마공의 일인자는 재명공자요. 이를 상대할 내공은 하나뿐이요. 바로 흡인공. 귀공은 부디 흡인공을 절정으로 익혀 재명공자의 흡입마공을 상대하기 바라오."

유방은 흡인공을 쓸 때 자신의 감정까지 억제했다. 기원전 203년, 한신은 제나라의 70여개 성을 공격해 손에 넣었다. 세력을 얻게 된 한신은 유방과 맞설 마음이 생겼다. 한신은 "(내가) 제나라 왕이 되지 않으면 형세를 안정시키기 어렵다"는 서신을 유방에게 보냈다. 당시 유방은 항우의 군대에 겹겹으로 포위돼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아내마저 항우에게 잡혀 분통이 터지던 때다. 당장 구하러 오지는 않고 거래를 하려 한다며 유방은 갖은 욕설로 한신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의 수하 장량과 진평이 "지금은 한신이 필요할 때"라고 조언하자 금세 화를 거두고 말을 바꿨다. "못난 양반. 대장부가 큰 공을 세우고 제후를 평정했으면 떳떳하게 왕이 되면 그만이지. 뭣 때문에 왕으로 허락해달라고 난리인가"라며. 그렇게 한신을 거둔 유방은 결국 한신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게 된다.

"유방이 아니라 항우였다면 어땠을까? 당장 말을 타고 달려가 한신의 목을 쳤을 것이오. 아니면 최소한 평생 한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요. "

"귀제갈 김종인, 삼고초려가 아니라 십고초려라도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그게 시늉이든 진심이든. "

한길공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흡인공의 요체는 인(忍), 참고 또 참는 것이요. 인이란 마음(心)에 칼날(刃)이 올려져 있는 모양. 무릇 칼로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소."

"명심, 또 명심하리다. 부디 천하의 내로라하는 좌파·중도 무인을 모두 내게 불러주십시오. 인(忍)의 요결로 흡인공을 펼쳐 그들과 함께 천하를 도모하겠소. 내 비록 호랑이로 태어났으나 늑대 떼에 쓰러진 항우가 아니라 유방이 되리다."

# 역발산 기개세도 사면초가에 꺾였다

무림지존이었다. 이번이 벌써 세번째던가. 첫 전통(電通)은 이달초 더불어당의 지존비무대책위원회 출범 직후였다. '이 양반도 무척 급해졌군'

"어이쿠 지존께서 어찌 또 연락을 주셨는지. 며칠 전 강호 백성들과의 대화는 감동적이었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귀공의 승리에 도움이 돼야 할 텐데 변죽만 울리다 만 것 아닌지 걱정입니다."

"강호인들이 충심으로 지존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한 젊은 친구가 '지존님, 얼마 안 남았지만,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라고 할 때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골라 부른들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지요."

재인군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지, 임기 6개월 남은 역대 지존 중 나만큼 강호인들의 지지를 받은 지존이 또 어디 있으랴. 무려 사할. 무림의 사할이 지금껏 나를 추종하고 있지 않은가.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당신이 지금 내게 설탕을 바른 듯 입을 놀리는 것도 그래서겠지.

"내 서툰 조언을 한마디 할까 하는 데 괜찮겠습니까. "

"하명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하명이랄 것까지야. 하나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나를 밟고 가도 좋다는 겁니다. 특히 부동산 문제라면. 그러나 너무 심하게는 말았으면 합니다. 그랬다간 귀공에게도 득보다 실이 클 것이요. 둘은 초 패왕 말고 그를 물리친 유방이 되시라는 겁니다."

오호라. 내가 흡입마공을 익힌 줄 누구보다 잘 아는 재인군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뭔가. 유방은 욕심이 태산 같았지만, 더 큰 욕심을 위해 작은 사욕(私慾)을 참을 줄 아는 사내였다. 설마? 대장동 때문에? 나를 의심한단 말인가.

유방은 원대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인내했다. 사욕도 억제했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했을 때다. 유방은 궁 안의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번쾌가 출궁을 권했지만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량의 충언에 따라 눈앞의 재물을 그대로 둔 채 단호히 궁을 빠져나왔다. 진나라 백성들이 술과 고기를 바쳐도 받지 않았고, 동전 한 푼 함부로 거둬들이지 않았다. 이때 나온 말이 엄한 군기로 민간의 것은 추호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추호무범(秋毫無犯)이다.

나야말로 유방처럼 살았다. 사욕을 철저히 눌렀다. 대장동 개발 때 수천억~수조 원이 굴러들어왔다. 내가 취하려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호히 물리쳤다. 삼가고 또 삼갔다. 화천대유며 천화동인이 금은보화를 바쳐도 받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동전 한 푼 함부로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재인군의 이 느끼한 조언은?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바꾸겠습니다. 납작엎드려큰절하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자신만만 재명공자는합니다는 잠시 접어놓겠습니다. 더불어당의 지존비무대책위원회부터 싹 갈아엎겠습니다. 어떤 무공이든 겸손과감성초식으로 바꿔 펼치겠습니다. 기필코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꺾은 유방이 되겠습니다."

나는 변방의 무공으로 정통 무공을 꺾고 여기까지 왔다. 정통 무공은 배운 적도 익힌 적도 없다. 기회도 없었다. 기본소득공이며 무차별현금살포공, 국토보유세공까지 내 성명절기는 모두 변방의 무공이라며 천대받던 것들이다. 그것으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나찰수와의 승부는 다르다. 변방 무공들이 잘 먹히지 않는다. 시간도 내 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안 통하는 초식은 안 쓰면 된다. 다른 무공으로 승부하면 된다. 세인들은 잘 모르나 나의 최고 절기는 흡입신공. 흡입신공은 세상의 모든 무공을 빨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절대 신공. 능소능대하며 능약능강이라. 어떤 초식인들 펼치지 못할 것이 없다.

단호한 재명공자의 목소리. 재인군은 일면 안심했고 일면 섬뜩했다. 재명공자는 천재다. 흡입신공을 익혔다고 누구나 남의 무공을 쉽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는 다르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남의 무공을 훔칠 수 있다. 원 소유자보다 더 잘 펼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태산보다 큰 권력욕을 가졌다. 지존좌를 쥐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내다. 내가 대장동 건을 슬쩍 흘리자 당장 납작 엎드리는 것을 보라. 아무나 못 하는 일이다. 이런 자는 강호에 다시 없다. 그는 반드시 차기 지존좌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열망. 천하를 쥐려면 천하만큼 큰 열망이 있어야 한다. 유방이 그랬으며 재명공자가 그런 자다. 그런데 그 열망으로 천하를 쥔 유방이 한신을 어떻게 처리했더라. 무림지존 재인군의 미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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