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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G20 정상회의, 글로벌 통상위기 극복위해 역할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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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지금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선진국과 개도국 구분할 것 없이 모두 저성장, 고실업, 소득 양극화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아가 세계경제는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국가가 보호무역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압력이 커지면서 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무역에서 국가안보를 넘어 첨단기술 분야로 확대되고 있어 국제관계, 안보, 국제무역, 공급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

현시점에서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통제하고 안정시킬 수 있는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제무역 분야에서 글로벌 거버넌스 역할을 해 오던 세계무역기구(WTO)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문제의 핵심은 164개 회원국의 합의가 필수적인 WTO의 경직된 의사결정 방식에 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회원국이라도 반대하면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다. 2001년 출범한 다자무역협상인 ‘도하라운드’도 이러한 벽에 부딪쳐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 때문인지 다음 주에 개최되는 제12차 WTO 각료회의에 대한 기대가 그리 크지 않다.

세계 여러 분야서 불확실성 증대
글로벌 거버넌스 결여가 더 문제
G20 체제, WTO 재건 의무 있어
한국도 G20회의서 목소리 내야

일부 전문가들은 다자무역체제의 대안으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RCEP)’ 등과 같은 지역무역협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역무역협정은 WTO가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긴 하지만 다자무역체제의 개혁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다른 전문가들은 입장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참여하는 복수국가협정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WTO 체제하에서는 복수국가협정을 추진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는 2008년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 금융시장으로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당시 부시 미 대통령은 2008년 11월 주요 선진 7개국(G7), 각 대륙의 주요국 및 거대신흥개도국 12개국, 그리고 유럽연합(EU) 의장국 등 20개국을 초청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그 후 G20 정상회의는 2009년과 2010년에 연 2회씩이나 개최되었다. 당시 G20 국가들은 철저하게 거시경제정책 공조를 이루어냈으며 이를 통해 1929년 경제 대공황에 버금가는 세계적 수준의 경제위기를 극복해 냈다. 이는 G20의 회원국 구성이 지역과 경제발전 수준을 고려해 균형 있게 이루어졌고 이들이 세계경제의 80%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G20 정상회의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새로운 보호무역조치를 자제하자는 동결조치(stand-still)에 합의하는 등 큰 성과를 낸 바 있다. 2012년 처음으로 ‘G20 통상장관회의’가 멕시코에서 개최면서 G20 체제가 국제무역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주요 회원국인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등 이른바 브릭스(BRICS) 거대 신흥 개도국들은 G20 체제가 국제무역, 특히 WTO 이슈를 논의하는 것에 반대했다. G20 체제는 20개 국가에 불과함으로 164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WTO의 의사결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20 통상장관회의는 2016년에 ‘무역투자실무기구’를 설치했으며 WTO에서 협상이 진행 중이던 전자상거래 및 투자촉진 등의 분야에서 논의를 촉진시켰다. 하지만 G20 정상회의는 WTO 개혁을 추진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이제 WTO가 처해 있는 상황을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다. 회원국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유로 20여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다자무역체제가 과연 존재해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WTO 체제에서는 논의만 계속될 뿐 회원국들의 합의는 도출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세계무역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G20 회원국들은 WTO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물론 과거처럼 WTO관련 의제가 G20 정상회의에서 합의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WTO를 이대로 방치했을 때 감당해야 할 피해와 비용을 고려하면 G20 정상들은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큰 틀의 의제들, 예를 들어 상소기구의 정상화, 복수국가협정 허용 등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G20 정상회의의 합의는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정치적으로 WTO 회원국들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제 G20 정상회의가 글로벌 통상위기를 극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내년에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될 G20 정상회의가 이러한 역할의 시발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G20 회원국인 우리나라도 앞으로 G20 정상회의가 다자무역체제를 재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