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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 대출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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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경제에디터

염태정 경제에디터

닫혔던 은행 대출의 문이 잠깐 열렸다. 하나·KB국민을 비롯한 주요 은행이 이달 하순부터 아파트 대출, 신용 대출 상품을 다시 팔거나, 대출 조건을 완화하고 있다.

꽁꽁 묶었던 대출을 푼다니 좋은 소식인데, 잘했네 하는 마음보다 정부와 은행이란 강력한 갑들이 돈 필요한 서민을 손안에 두고 쥐락펴락하는 느낌이 먼저 든다. 대출 수요자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정부·은행 위주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은행들이 다시 대출에 나서는 건 전세대출이 가계대출 총량관리 목표치(증가율 연 6%대)에서 빠지고, 강력한 규제로 증가세가 둔화하면서 대출에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올해 관리치 목표에 여유가 생겨 푼 거니 내년 되면 다시 더 세게 조일 거다.

막았던 대출 살짝 풀었다 다시 조여
돈 필요한 사람보다 정부·은행 위주
막대한 가계 대출 관리 필요하지만
예측 가능한 합리적 대출 정책 필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하는 경우는 대부분 집 관련해 큰돈이 필요하거나, 아이들 교육비, 집안 사정 등으로 목돈이 필요해서다. 이런 돈은 상당한 기간을 두고 계획해 마련해야 한다. 이번처럼 잠깐 대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많은 사람에게 크게 도움은 안 될 거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가계 빚은 사상 최대다. 한국은행이 23일 발표한 ‘2021년 3분기 가계신용(잠정치)’을 보면 9월 말 가계신용은 1844조9000억원으로 전 분기(6월 말) 보다 36조7000억원, 전년 동기보다 163조1000억원 늘었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명목 1933조원)에 육박한다. 위험한 수준이다. 관리가 필요하다. 정부 걱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은행에서 돈 빌리는 것을 군사 작전하듯 밀어붙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돈이 필요한데 불쑥 대출이 막혀 낭패 보는 사람들이 많다.

가계 대출에 대해 정부는 “상환 능력 중심의 대출 관행 정립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대응하겠다”(고승범 금융위원장)는 입장이다. 맞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의 대출 규제가 그런 기준에 맞춰 합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돈 빌리는 사람의 능력과 관계없이 어느 날 갑자기 대출을 중단하고 이번처럼 불쑥 대출을 재개한다. 신용낮은 사람보다 신용높은 사람이 돈 빌리기 어려운 기현상도 생긴다. 그러니 은행에서 대출받기 위해 신용점수를 낮춰야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비교적 돈을 싸게 빌릴 수 있는 은행을 막으니 돈값이 비싼 제2금융, 제3금융으로 간다. 이자 부담은 더 커진다. 더구나 금리도 오르고 있다. 한국은행은 25일 기준 금리를 0.25%포인트 올려 제로 금리 시대도 끝났다.

대출이자 내는 사람은 금리 인상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금융당국은 친절하게도 금리인하 요구권을 활용하라 조언한다. 그런데 은행가서 금리인하 요구해 본 사람은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생각보다 어렵다.

가계 빚 절반가량은 주택담보대출이다. 9월 말 기준 969조원이다. 집 때문에 빌린 돈이란 얘기다. 이번 정부는 돈 빌려 집 사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투기꾼 취급한다. 투기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내 집 마련은 보통 사람의 꿈이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니 살 집 마련하려면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안 사면 아예 집을 못 살까 걱정도 된다.

정부는 실수요자에게는 대출 규제 피해가 없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세대출을 총량 규제 한도에서 뺐다. 15억원이 넘는 아파트 매입은 어떤가. 투기가 아니라 가족과 같이 살 집도 규제지역에선 15억원이 넘으면 대출이 안 된다. 10월 기준 수도권 상위 20% 아파트값이 평균 15억 307만원이다. 대출 없이 집 살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15억원 넘는 집을 사려는 사람 중에 투기꾼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실수요자라고 봐야 한다.

금융당국은 내년 대출 총량 규제 목표치를 올해보다 낮은 수준(증가율 연 4~5%)으로 한다 하니, 은행에서 돈 빌리기는 더 어려워진다. 내년부턴 전체 대출액이 2억원을 넘으면 총부채 원리금 상환비율(DSR) 규제도 적용된다.

정부가 고민 끝에 내놓은 정책일 거다. 가계 빚을 줄이기 위한 노력도 좋고, 투기 방지도 좋다. 하지만 정말 실수요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해 대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상환능력, 신용도 반영도 더욱 정밀하게 해야 한다. 지금 정부가 은행을 앞세워, 혹은 은행과 손잡고 휘두르는 대출 규제의 칼은 너무 거칠다. 정책의 소비자, 대출상품 구매자라는 고객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예고 없이 불쑥 대출을 중단하거나 갑자기 살짝 재개하지 말고 돈 빌리는 것을 예측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계획을 세워 생활하고 미래를 꿈꿔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