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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사건엔 공분, 펑솨이 사건엔 잠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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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성훈 기자 중앙일보 베이징특파원
박성훈 베이징특파원

박성훈 베이징특파원

한 노인이 개에 물린 한 사건이 지난 일주일 중국을 뜨겁게 달궜다. 왜일까. 중국 사회의 민낯이 여기에 있다.

지난 9월 20일, 중국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시의 한 아파트. 겅모(78)씨는 산책을 하다 한 여성이 끌고 오던 허리 높이만한 개 2마리에게 물리는 봉변을 당했다. 목줄에 묶인 개가 바로 옆을 지나는 겅씨에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등에 이빨자국 6곳, 배 3곳에 상처를 입었다. 아파트 CCTV에서 어머니가 물리는 영상을 확인한 왕씨는 개 주인의 집을 찾아갔지만 쫓겨났다. 고심하던 왕씨는 허난TV 시청자 제보 프로그램 ‘샤오리가 돕는다’(Xiaoli to the Rescue)에 이를 알렸다.

78세 겅모씨가 개에 물리는 장면이 찍힌 CCTV. [웨이보 캡처]

78세 겅모씨가 개에 물리는 장면이 찍힌 CCTV. [웨이보 캡처]

동네 민원으로 보였던 사건은 개 주인의 남편이 안양시 시장감독국 고위직(2급) 왕신강(王新剛·56)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반전을 맞는다. 공직자 가족의 횡포라 생각한 리(莉) 기자는 그를 찾아갔다 의문의 남성들에게 쫓겨났다. 시장감독국에서도 “답변할 게 없다”는 말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경찰도 “기다리라”는 답변뿐이었다. 도와주는 기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결 기미가 없자 리는 두달 뒤 다시 왕신강의 집을 찾았다. 왕은 CCTV 화면을 보고도 “인정할 수 없다”며 어이없게 대답했고 이들을 내쫓았다. 리는 겅씨를 만나 “진실은 있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프로그램은 왕의 해명과 리 기자가 우는 장면을 함께 내보냈다.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 전 부총리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테니스 선수 펑솨이. [AFP=연합뉴스]

중국 전 부총리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테니스 선수 펑솨이. [AFP=연합뉴스]

“특권층은 잘못하고 사과 안 해도 되나” “제대로 조사해서 엄벌해라” 개 사건의 조회수는 중국 전역에서 하루 만에 2억 회를 넘어섰다. ‘인민을 짓밟는 고위직’이라며 분노는 확산됐다. 결국 20일 왕신강은 겅씨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고개를 떨궜다. 다음날 안양시는 왕신강의 해임을 발표했고, 이튿날엔 인민일보와 중앙기율위원회까지 나서 “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공직자가 횡포를 저질렀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했다. 언론들의 ‘참회성’ 보도도 이어졌다. “관계 기관이 나서지 않을 때 언론까지 침묵해서는 안 됐다”며 만연한 눈치보기식 행정 관행을 질타했다.

그런데 드는 의문. 중국 전 부총리의 성폭행을 폭로한 테니스 스타 펑솨이의 사건에는 왜 중국 사회가 잠잠할까. 공개 20분 만에 삭제됐으니 애초 여론이 있을 수 없다는 설명이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왕신강의 일이 커진 건 반대로 중국 정부가 알고도 여론을 뒀다는 얘기일까. 왕에 대한 단죄가 중국인에겐 정의 구현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내 눈엔 왠지 더 큰 통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