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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에 얼룩진 페미니즘, 성평등과 공존의 의미 사라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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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20대 남녀갈등, 왜 서로 미워하나

20대는 남녀갈등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생각한다. 지난 4월 서울시가 발표한 ‘사회갈등 이슈 진단’ 보고서에서 제일 높은 점수(4.45점, 만점 5점)를 기록했다. 부동산(4.34점), 빈부격차(4.18점)는 그다음이었다.

극단적인 여혐·남혐의 진원은 일간베스트와 워마드(아래 사진)다. 서로를 ‘김치녀’ ‘한남충’ 등으로 비하하며 갈등을 부추긴다. [각 홈페이지 캡처]

극단적인 여혐·남혐의 진원은 일간베스트와 워마드(아래 사진)다. 서로를 ‘김치녀’ ‘한남충’ 등으로 비하하며 갈등을 부추긴다. [각 홈페이지 캡처]

20대 남녀갈등의 본질은 뭘까.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정치권이) 2030을 성별로 갈라치기를 하고, 안티 페미니즘을 선동한다”(18일)고 비판했다. 정치인이 남녀갈등을 악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이를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이라고 말한다. 정치인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다양한 사회 갈등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편취하고 부풀린다는 이야기다. (『절반의 인민주권』) 여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객관적인 현실과 조작된 갈등 구도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극단적인 여혐·남혐의 진원은 일간베스트(위 사진)와 워마드다. 서로를 ‘김치녀’ ‘한남충’ 등으로 비하하며 갈등을 부추긴다. [각 홈페이지 캡처]

극단적인 여혐·남혐의 진원은 일간베스트(위 사진)와 워마드다. 서로를 ‘김치녀’ ‘한남충’ 등으로 비하하며 갈등을 부추긴다. [각 홈페이지 캡처]

저성장시대 취업난에 갈등 격화
‘우리가 더 억울’ 피해의식 높아져
정치권도 남녀대립 부추긴 양상
한쪽 편만 드는 갈등 부각 멈춰야

정고운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20대 남성이 느끼는 역차별의 본질은 여성에 대한 불편함보다 게임의 법칙에 대한 분노에 가깝다”고 말했다.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취업이 어려워진 남성들은 여성할당제·남성군복무제 등에 비판적 입장을 갖기 쉽다. 반면 20대 여성은 사적 영역의 차별에 주목한다. “학력과 능력이 동등해도 육아·가사 부담이 여성에게 쏠린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20대 남녀 모두 차별을 느끼지만, 차별의 영역과 준거집단이 다르다”며 “갈등만 부각해 한쪽 편을 들지 말고 양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성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극단적인 남녀갈등의 시발점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1주기 집회가 열리는 등 논란이 계속 커졌다. [중앙포토]

극단적인 남녀갈등의 시발점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1주기 집회가 열리는 등 논란이 계속 커졌다. [중앙포토]

20대 남성 박모씨는 “남자로서 특권을 누리기는커녕 군복무로 손해만 봤으니 오히려 남성차별”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남자여서 좋겠다’는 식의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며 “특권을 누린 건 아버지 세대인데 책임만 떠안는다”고 토로했다.

박씨의 말처럼 아버지 세대엔 남성 특권이 있었다. 1970~80년대 대학에 다닌 남성을 예로 들면, 여성의 대학 진학률과 취업률이 낮아 상대적으로 사회 진출이 쉬웠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1970년 18∼21세 여성 중 대학생 비율은 3.3%에 불과했다. 1980년엔 대학 입학자 중 여성이 27.4%, 남성은 72.6%였다.

이런 상황에선 소수인 여성을 경쟁자로 인식하기 어려웠다. 숫자도 적었고 취업 후 출산·양육 등으로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잦았다. 한창 고성장하던 시기여서 각종 자원을 획득할 기회도 많았다. 중견기업 임원 최모(56)씨는 “약자인 여성에겐 사회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즘과는 결이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은 어떨까. 적어도 진학·취업 등 20대가 경험하는 생활세계 안에서 남성은 여성을 약자로 보지 않는다. 2020년 대학 신입생은 남성(50.9%)과 여성(49.1%)의 성비가 같다. 오히려 올해 9급 공무원 합격자 중 여성 비율(55%)이 더 높다. 서울의 공립 중등교원 합격자는 80.9%가 여성이다. 초등(86.8%)은 더욱 쏠렸다.

사회학의 집단위협이론 관점에서 보면 과거엔 경쟁자로 인식하지 못했던 여성이, 지금은 강력한 경쟁자로 대두하면서 남성의 위기의식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취업난까지 더해 경쟁이 치열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 15~29세 체감실업률(25.4%)은 30대(11.7%), 40대(9.8%)보다 월등히 높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체감경제고통지수(1~6월) 역시 15~29세(27.2)가 전 세대 중 가장 높다. 50대(14)와 40대(11.5)는 청년보다 안정됐다.

잔존하는 가부장 문화의 그늘

고 박원순 전 시장 사건 때는 여성 정치인들이 ‘피해 호소인’을 주장하며 페미니즘의 본질을 훼손시켰다는 지적도 나왔다. [중앙포토]

고 박원순 전 시장 사건 때는 여성 정치인들이 ‘피해 호소인’을 주장하며 페미니즘의 본질을 훼손시켰다는 지적도 나왔다. [중앙포토]

직장인 박모(33)씨는 “남녀평등이라지만 막상 결혼할 때는 남자가 더 큰 비용을 대고, 학력·직업도 더 좋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고운 교수는 “남성에겐 여전히 생계부양자 모델이, 여성에겐 양육자 모델이 적용된다”며 “성역할 인식이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결혼시장에선 아직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자신보다 학력·소득이 낮은 배우자와 결혼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지난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30세 이상 여성 대학원 졸업자의 미혼율은 22.1%로, 교육수준별 미혼율을 봤을 때 가장 높다.

2020년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미혼인구의 결혼의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보고서에 따르면 배우자의 기대소득으로 월 300만원 이상을 생각한 비율은 여성(74%)이 남성(14.8%)의 5배다. 보고서는 “여성의 기대를 충족하는 남성은 매우 적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교육부의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통계연보(2018)에 따르면 한해 대학(원) 졸업자 중 월 300만원 이상 직장에 취업한 비율은 12.5%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로 오해하거나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극단적 인식도 문제다. 대학원에서 젠더 사회학을 연구하고 있는 서세혁(29)씨는 “2030 남성 중엔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며 “성평등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 용어 자체엔 거부감을 갖는다”고 말했다.

여성우월주의라는 또 다른 오해

정고운

정고운

서씨는 연구에 참여했던 면접자들의 실제 사례를 들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급진주의가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에서 시작한 미러링이 유행하면서 ‘한남충’ 같은 남혐 표현이 만들어졌고, 이로 인해 많은 남성이 반감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정치권도 남녀갈등을 부추긴다. 21일 “페미니즘이 싫으면 여성을 죽이지 말라”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발언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프레임은 사라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물론 “(특정 사례를) 일반화하지 말라”는 지적엔 공감하지만, 이대남의 페미니즘 거부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도 없지 않다. 특히 이 대표가 ‘고유정 사건’까지 끌어들인 것은 남성 가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교제살인의 본질에 어긋난 주장이다.

하수정

하수정

20대 여성도 극단적 페미니즘은 경계한다. 직장인 김혜수(26)씨는 “출산·양육 이후 겪는 여성 차별이 유리천장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격한 페미니즘은 여성이 봐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씌워진 이미지를 남성 입장에선 여성우월주의라고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과도기 상태에서 이슈를 선점하려고 과한 언행을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 운동가·정치인이 페미니즘을 오염시키기도 한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 때 ‘피해 호소인’을 관철했던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여성운동계의 대모로 불리던 그는 가해자를 두둔하고 2차 가해를 벌여 논란이 됐다. 정치적 진영 논리에 페미니즘이 포획된 것이다. 당시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은 “여성운동가의 탈을 쓴 ‘여성운동 호소인’의 민낯”이라고 비판했다.

스웨덴은 특정 성별 우대하지 않아

대안은 뭐가 있을까.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유리천장지수’ 1위(2021)로 꼽은 스웨덴은 ‘성평등’을 넘어 ‘성별을 묻지 않는 사회(gender free)’로 가고 있다. 지난 8월 이임한 야콥 할그렌 전 스웨덴 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성평등 논의는 모든 국민이 잠재력을 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상식으로 귀결된다”며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일·가정의 균형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대학 입학생 성비

대학 입학생 성비

스웨덴의 여성우대 정책은.
“법적으로 여성만 우대하는 제도는 없다. 단 재정사업 지원 등에서 골고루 성비를 맞추면 인센티브를 준다.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하는 부분까지 인위적인 할당을 하진 않는다. 여성 스스로 평등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단지 여성이라서 얻는 특혜는 거부한다. 남성도 육아와 가사 일을 평등하게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가.
“한국에선 페미니즘이라는 표현이 평등이라는 원뜻과 달리 정쟁에 이용된 감이 있다. 스웨덴에선 남성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함께 공존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모두에게 이롭다고 본다. 남성도 차별받을 수 있기에 ‘미투’ 역시 남녀가 아닌 권력관계로 여긴다. 미투 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남성의 지지를 끌어낸 이유다. 한국의 여성가족부에 해당하는 성평등부는 2010년 폐지됐고, 관련 기능은 고용부로 통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