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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간판 내린 배구단 데자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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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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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출범 전이니까 20년 가까이 된 얘기다. 한 배구팀이 있었다. 최고 선수가 즐비한데도 매 시즌 어처구니없는 성적을 거뒀다. 선수가 얼마나 좋았냐 하면, 한 번은 당시 최고 사령탑이던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한테 물어봤다. “혹시 피치 못하게 다른 팀을 맡아야 한다면 어느 팀을 맡고 싶으세요.” 신 감독은 망설임 없이 그 팀을 꼽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선수들 함 봐요. 쟈들 데리고 성적 못 내면 이상하지.” 신 감독이 그 팀을 맡지는 않았다. 그 팀 성적은 계속 거기에서 거기였다.

그 팀 속사정을 알게 된 건 시간이 좀 지나서다. 한때 그 팀을 맡았던 감독에게 물었다. “다들 그 팀은 선수가 최고라던데, 성적은 왜 그런가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프런트가 문제다. 단장과 감독은 계속 바뀌지만, 프런트(사무국)는 안 바뀌고 그대로다. 단장은 모기업에 돌아갈 생각뿐이고 감독은 사실상 프런트가 데려온다. 언젠가부터 선수들이 매사를 코칭스태프 대신 프런트와 상의하더라. 선수한테 ‘코칭스태프와 상의하라’ 하니, 다음날 프런트가 찾아와 ‘감독님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하는 선수가 많다’고 했다. 얼마 후 성적 부진 등을 이유로 사령탑에서 내려와야 했다”고 쏟아냈다.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서남원 감독(왼쪽)과 감독 시선을 피하는 IBK기업은행 세터 조송화. [사진 KOVO]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서남원 감독(왼쪽)과 감독 시선을 피하는 IBK기업은행 세터 조송화. [사진 KOVO]

변명도 섞였을 테니 그 말을 다 믿지는 않는다. 신기한 건 그 팀 출신 감독들 얘기가 비슷하다는 거다. 최근 유사한 사례를 보고 있다. 이른바 여자 프로배구 ‘IBK기업은행 사태’다. 전후는 이렇다. 서남원 신임 감독과 세터 조송화 선수가 삐걱거렸다. 선수는 감독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감독 추궁에 침묵하다 팀을 이탈했다. 감독은 김사니 세터 코치를 다그쳤는데, 인격모독이라며 코치도 팀을 이탈했다. 팀은 8연패에 빠졌다. 구단은 감독을 경질하고 김 코치를 감독대행에 앉혔다. 마술처럼 그날 팀은 첫 승리를 거뒀고, 조송화는 팀 복귀를 희망했다. 프런트는 선수와 밀착한 분위기다. 서 감독 전임자 김우재 전 감독 사퇴 당시 상황도 이번과 비슷하다는 말이 나온다.

여자배구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돌이켜보면 인기가 치솟기 시작한 건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 데뷔 즈음부터다. 지난해 김연경의 국내 복귀가 기름을 부었고, 도쿄올림픽 4강 진출 쾌거가 불을 댕겼다. 지금은 쌍둥이도 없고 김연경도 떠났다. 허약한 토대 위에 세운 탑이 ‘IBK사태’로 휘청댈 조짐이다. 감독, 코치, 선수, 구단 프런트, 모기업인 IBK기업은행, 한국배구연맹(KOVO) 모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20년 가까이 된 그 팀 얘기다. 프로배구 출범 뒤에도 그 팀 성적은 별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모기업 사정으로 배구단 간판을 몇 차례 바꿔 달더니 결국은 내렸다. IBK 배구단은 그 팀을 반면교사로 삼을까, 아니면 그 팀의 데자뷔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