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충북 청주시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 커다란 1번 전산실에 들어서자 검은색 캐비넷 62개에서 수천개의 초록빛이 깜박였다. 거대한 빛의 정체는 세계에서 27번째로 성능이 좋다는 컴퓨터 '마루'에 탑재된 CPU 판들이었다. 컴퓨터에서 나오는 열기로 내부 기온은 26.4도를 가리켰다. 맞은편 2번 전산실도 컴퓨터로 가득 찼다.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컴퓨터 '그루'(세계 28위)와 '두루'(초기분)가 작동 중이었다.
이 세 컴퓨터는 지난 8월부터 이곳에서 본격 가동된 기상청 슈퍼컴퓨터 5호기다. 이날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됐지만, 사진 촬영은 금지됐다. 기술자 33명이 있는 통제실은 매분 매초 바쁘게 돌아간다. 슈퍼컴퓨터 5호기가 쏟아내는 지구 전역의 기상정보가 텍스트와 그래픽으로 쏟아졌다. 특히 통제실 앞쪽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 표시된 전 세계 지도와 기상 수치들은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세계 27위 컴퓨터 "초당 계산 5경 번 가능"
기상청은 2019년 슈퍼컴퓨터 5호기의 초기 버전인 두루를, 지난해 6월엔 최종 버전인 마루·그루를 설치했다. 구매와 설치에 든 비용은 약 628억원이다. 이들은 시범 운영을 거쳐 올 8월부터 기상 예보에 100% 투입됐다.
기상청에 따르면 5호기의 연산 성능은 51PFlops으로, 초당 5경 번의 연산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메모리를 합치면 2391TB에 달한다. 이전에 쓰던 4호기에 비해 약 8.8배 계산 능력이 좋아졌다. 메모리는 6배 정도 늘어난 셈이라고 한다.
슈퍼컴퓨터는 매년 6, 11월 세계 성능 최고 500위 안으로 선정되는 컴퓨터를 말한다. 마루와 그루는 이달 기준 27위, 28위를 차지했다. 5호기 도입 테스트 운영을 맡았던 두루는 엄밀히 따지면 500위 밖이다. 기상 예측 수행에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세 컴퓨터를 묶어 통상 슈퍼컴퓨터라고 한다. 기존에 쓰였던 4호기도 '고물'은 아니다. 여전히 251위(누리), 252위(미리)로 슈퍼컴퓨터 범주에 들어간다.
한국, 9번째 '자체기상예보 국가'
한국 기상청은 새로운 슈퍼컴퓨터를 통해 세계 9번째로 자체 기상예보모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난해 2월 두루가 한국형수치예보모델(KIM)을 처음 가동한 게 시작이었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 올해 마루·그루가 운영되면서다.
앞서 기상청은 4호기를 이용해 영국 등 해외 예보시스템을 빌려 운영해왔다. 하지만 5호기를 도입하면서 우리만의 KIM을 운영할 여력을 확보했다. 장근일 국가기상슈퍼컴퓨터센터장은 "앞으로는 국내 기상 예측을 해외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새로운 기상 이론을 자체 모델에 실시간으로 반영하면서 늘 최신 예보 모델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슈퍼컴퓨터 5호기가 운영하는 KIM은 가로세로 12㎞ 격자 크기로 중단기 기상예보를 할 수 있다. 10㎞ 크기로 지역별 예보하는 영국모델(UM)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큰 차이는 아니라고 한다. 강현석 기상청 수치모델개발과장은 "5일 뒤 나타날 고기압·저기압의 크기와 위치를 98% 정확도로 맞출 수 있는 정도의 예측 능력이다. 미국·영국 기상청의 통합모델 수준엔 다소 못 미치지만 일본 기상청 모델과 유사하거나 근소하게 앞서는 수준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은 5호기를 향후 5년 이상 KIM 운영에 활용할 예정이다. 현재 병행 사용하고 있는 4호기는 내년 하반기 농촌진흥청이 가져가 농업 연구에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장근일 센터장은 "KIM 모델이 더 정교화되면 새로운 슈퍼컴퓨터가 필요하겠지만 최소 5년간은 5호기가 활약할 수 있다고 본다. 역할을 다한 뒤 어디로 옮겨질지는 논의 중이며 내년쯤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