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14)
1626년(인조 4) 임금의 생모를 둘러싼 상복 논의가 일어난다. 이귀‧최명길 등은 임금도 아들인 만큼 상주로서 삼년복을 입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예학으로 이름을 얻은 우복 정경세와 사계 김장생은 1년짜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논란 끝에 기년복이 받아들여졌다.
![정경세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등 5현을 기리기 위해 상주에 창건한 도남서원. [사진 송의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11/25/a51901e1-92ba-40c9-bda4-7182f4619f85.jpg)
정경세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 등 5현을 기리기 위해 상주에 창건한 도남서원. [사진 송의호]
김장생과 정경세가 같은 주장을 펼친 것은 뜻밖이었다. 사계는 율곡 이이를 잇는 기호학파의 예학을 대표했고 정경세는 영남학파였기 때문이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남인과 서인은 당시 경쟁과 대립의 양대 세력이었다.
퇴계학을 계승한 서애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는 고질적인 파당 구도를 바꾸고 싶었다. 그가 먼저 소통을 시도한다. 그는 반대편에 있던 오윤겸·정엽을 통해 율곡과 우계 성혼에 대한 인식을 수정하고 김장생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했다. “빌려 온 『가례고증』세 책은 바쁜 탓으로 미처 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정경세가 김장생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정경세는 이렇게 김장생을 찾아가 서책을 빌리는 등 교류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정경세의 학문적 좌표도 조금씩 조정되었다.
1623년 뜻밖의 일로 두 진영은 더욱 가까워진다. 혼인이다. 김장생의 제자 송준길이 영남학파 정경세의 둘째 사위가 된 것이다. 이후 회덕 출신 송준길은 처가 상주에서 10년을 보내며 제자까지 기른다. 송준길은 정경세를 통해 퇴계학을 접했다. 송준길은 장인이 세상을 뜨자 일대기에 가까운 장문의 행장(行狀)을 짓고, 또 연보를 만들었다. 송준길은 후일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다. 상주에는 그 뒤 노론 송준길을 기리는 흥암서원이 들어섰다. 흥암서원은 대원군 시절에도 훼철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경세가 관직을 그만둔 뒤 저술하고 강학한 상주의 대산루. [사진 송의호]](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11/25/de127a94-7516-4a2c-944c-7861bc809a24.jpg)
정경세가 관직을 그만둔 뒤 저술하고 강학한 상주의 대산루. [사진 송의호]
혼인의 뒷이야기는 흥미롭다. 한번은 정경세가 김장생을 찾아갔다. 김장생은 정경세에게 혼기에 든 딸이 있다는 걸 알고 “저쪽 방을 가보라”며 제자들이 공부하는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 송시열‧이유태‧송준길이 있으니 그중 한 사람을 사윗감으로 고르라는 뜻이었다. 정경세가 다가가 방 안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이 반듯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송준길이었다.
김장생과 정경세는 당파가 달랐지만 이렇게 교분이 각별했다. 그 바탕 위에 두 사람은 예설(禮說)을 자주 논의했다.
![정경세 벼루. [사진 상주박물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11/25/7f57b515-558e-4fcc-992a-d231db3e963e.jpg)
정경세 벼루. [사진 상주박물관]
정경세는 김장생뿐만 아니라 서인 계열인 이덕형‧최명길‧장유 등과도 폭넓게 교유했다. 또 사위 송준길은 기호학파에서 누구보다 먼저 퇴계학을 체득하고 퇴계 이황을 흠모하게 된다. 송준길은 꿈에 퇴계가 나타나 그 감회를 ‘기몽(記夢)’이란 시로 남겼다. 그때부터 기호학파도 퇴계 학설을 받아들이고 새로이 평가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정경세는 이렇게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남인과 서인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송준길과 더불어 양송(兩宋)으로 불린 노론 송시열이 훗날 당파를 초월해 정경세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요청하는 시장(諡狀)을 쓴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