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터키서 성폭행, 韓영사에 피소…그 여대생 국제변호사 꿈꾼다

중앙일보

입력

3년 전 여름, 스무 두살 여대생은 악몽보다 더한 현실에 직면했다. 2018년 8월 12일 대학생 김수빈(가명)씨는 터키 이스탄불의 한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프랑스에서의 두 달간의 여행 겸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가 경유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터키인 민박집 주인의 계획된 범행 앞에 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건넨 술에는 약물이 들어있었다. 정신을 잃은 수빈씨는 성폭행 피해자가 돼 있었다.

터키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된 한국 여대생 

다음날 수빈씨는 터키 경찰에 민박집 주인을 고소했다. 혈액검사와 유전자 검사를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민박집 주인은 체포됐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불구속 수사를 받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빈씨는 주 이스탄불 총영사관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경찰 영사 A씨가 비협조적이라 느꼈다고 한다.

“A씨가 영사 업무와 관련이 없는데도 당시 범행 상황에 대해 적나라한 표현을 사용하며 구체적으로 질문했고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수사가 어렵다고 단정하는 식으로 말했다. 다른 공범에 대한 수사상황이나 CCTV 영상을 확보했는지 등을 물었는데도 확인한 뒤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해자 처벌을 위해 직접 터키 변호사를 구했다. 그러나,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민박집 주인 측은 연이어 악성 메일을 보냈다. 힘겹게 선임한 변호사는 외국인인 수빈씨에게 연이어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스트레스가 커진 수빈씨는 수면 중 자해를 하는 등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학업을 중단했고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거란 걱정에 20여년간 써온 이름까지 바꿨다. 성폭행 기억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국인 경찰 영사에 소송당해 

수빈씨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앞두고 자신의 SNS에 다짐을 남겼다. 사진 수빈씨 제공

수빈씨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앞두고 자신의 SNS에 다짐을 남겼다. 사진 수빈씨 제공

다행히도 지난해 6월 터키 대법원이 민박집 주인에게 징역 17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형량은 한국보다 중했다. 하지만, 수빈씨는 다시 법정에 서야 했다. 같은 달 한국인 경찰 영사 A씨로부터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했고 10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피고가 됐다. 2019년 3월 수빈씨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건 당시 A씨가 비협조적이었다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A씨는 “터키경찰서를 여러 차례 방문해 수사상황을 수빈씨에게 통보하는 등 경찰 영사로서 조력 업무를 다했다”며 “수빈씨가 언론사에 제보하면서 영사로서의 조력 업무 이행 관련해 허위진술을 해 보도가 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수빈씨의 제보로 본인의 명예가 훼손됐으니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성폭행 피해 해결 과정에서 다시 고통받아”

수빈씨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앞두고 변호사와 함께 과거 사건을 하나씩 되짚어봤다고 한다. 사진 수빈씨 제공

수빈씨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앞두고 변호사와 함께 과거 사건을 하나씩 되짚어봤다고 한다. 사진 수빈씨 제공

수빈씨는 당시의 상황에 숨이 막혔다고 한다. 그러나,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해외에서 성폭행 피해를 당한 채 무력하게 무너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빈씨는 ‘A씨가 2차 피해를 가했고 명예훼손죄로 고소해 정신적 피해를 줬으므로 3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반소를 제기했다.

법원은 양쪽의 소송을 모두 기각했다. 인천지법 제11민사부(부장 정찬근)는 본소에 대해 “수빈씨가 언론에 제보하면서 이 사건 관련 A씨의 발언이나 영사로서의 조력 업무 이행 관련해서 한 진술이 허위로서 A씨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수빈씨가 A씨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데에는 상당 부분 A씨의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 점 등을 볼 때 수빈씨의 진술이 허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수빈씨의 반소에 대해서도 “A씨의 발언이 성적 수치심을 주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곧바로 위법성이 인정돼 불법행위가 된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수빈씨의 소송을 도운 이은의 변호사는 “수빈씨는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말했다는 이유로 송사에 휩싸여 고통받았다”며 “공무원의 애환도 이해하지만, 잘못을 지적한 피해자를 고소하고 10억원을 청구하며 거짓말이라고 인정하라는 압박은 그 자체로 2차 가해다”라고 지적했다. A씨 측은 중앙일보에 “입장을 밝힐 게 없다”는 취지의 뜻을 전했다.

수빈씨는 국제 변호사로 꿈을 바꾼 뒤 미국 로스쿨 진학을 위해 매일 공부하고 있다. 사진 수빈씨 제공

수빈씨는 국제 변호사로 꿈을 바꾼 뒤 미국 로스쿨 진학을 위해 매일 공부하고 있다. 사진 수빈씨 제공

다시 꿈을 꾸다

소송이 끝났지만 수빈씨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했다. 자신의 피해를 언론에 알리기로 한 것도 해외에서 피해를 본 이들을 위한 제도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고 싶어서 국제변호사를 새로운 진로로 택했다. 수빈씨는 “힘들었지만, 함께 해 준 이들 덕에 이를 꽉 깨물며 버텼던 것 같다”며 “저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게 어두운 산책로 정도는 비출 수 있는 불빛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