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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역사 속 그들의 불합리한 선택을 바라보는 불편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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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합리적 선택이론’은 합리적일까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박태균의 역사와비평

역사를 만들고, 역사의 방향을 바꾸고, 역사를 완성하는 것은 모두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시대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또 이와 반대로 사람은 그 시대의 산물이기에, 당대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당대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만 인물 연구가 가능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향, 가족, 교육, 친지 등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들에 대해 접근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인물로부터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내고, 그 특징이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분석한다. 인물을 통해 시대를 보고, 시대를 통해 인물을 본다고 할까?

이승만 돕고도 간첩 혐의로 숙청된 조봉암의 정치적 행보
3선 개헌 막고 대통령 될 수도 있었던 김종필의 개헌 지지
민주화운동·개헌 성공하고도 단일화 실패한 김영삼·김대중
비합리적 행동을 해석 말고 받아들이는 게 합리적 해석일지도

조봉암은 왜 이승만 정부에 참여했을까?  

문제는 역사를 움직인 그들이 역사학자들의 기대를 배신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 인물이 풍미했던 시대, 그리고 그의 가족·교육·지역 등의 배경을 다 분석하면서 예측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뒤통수를 때리는 상황이 나타나곤 했다.

조봉암의 이승만 정부 참여, 특히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의 임명은 그중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가장 유명한 청년 공산주의자 중 하나였던 조봉암이 극우로 평가받고 있었던 이승만의 정부에 참여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데, 장관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더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는 국회 부의장이었음에도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췌개헌안의 통과를 막지  못했다.

이런 조봉암의 행동에 대해 ‘참여를 통한 개혁’을 추진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 해방 직후부터 갈등을 빚어 온 박헌영이 북한의 부수상이었기 때문에 결코 북으로 넘어갈 수 없었던 상황으로 그의 이승만 정부 참여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민주당과는 차마 손을 잡을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승만이 내민 손을 조봉암이 잡았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또 한 번의 반전은 1952년의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정권연장에 도움을 주었던 그가 곧바로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이 되어, 1954년 총선거부터는 집권 자유당으로부터 집중적인 견제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치깡패들의 개입으로 인해 총선거에 입후보자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이어 1956년 진보당을 창당했고, 결국 1959년 북한의 간첩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봉암의 정치적 행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종필은 왜 포기했을까?  

김종필은 5·16 쿠데타의 입안자였다. 그는 이승만 정부 시대 군부의 고위층들이 보여주었던 부정부패를 참을 수 없었다. 해방 직후 30대에 불과했던 친일 군인들이 전쟁을 거치면서 별을 달고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독재 정부, 재벌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4·19 혁명도 이들의 관행을 일소하지 못하자 김종필과 육사 8기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민주당 정부 시기 8기 중령들이 일으킨 소위 ‘하극상’이 그것이다.

하극상으로 옷을 벗었던 김종필은 현역 선배인 박정희를 앞에 내세워 5·16 쿠데타에 성공했다. 별도 달지 못하고 군을 떠났던 8기 중령들에게는 앞에 내세울 누군가가 필요했다. 김종필은 박정희를 내세웠고, 박정희는 육사 5기들을 동원했다. 김종필은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이기 위해 박정희가 동원한 육사 5기생들을 반혁명 사건으로 밀어냈다.

정보 독점을 통해 정치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설립되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는 지방을 순회하면서 의욕적인 청년들을 끌어모았다. 김종필을 통해 처음으로 중앙 정치에 참여하게 된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김종필을 1971년 대통령으로 밀고자 했다. 1963년의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한 번만 연임할 수 있었고, 박정희의 임기는 1971년이면 더 이상 연장이 불가능했다.

1967년 대선과 총선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여당에서 3선 개헌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4년밖에 안 되었지만, 권력의 주위에 똥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는 선을 그었지만, 짐짓 싫지 않은 눈치였다. 김종필을 지지했던 인사들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탈당을 불사하고 3선 개헌에 반대했다. 그런데 여기에 김종필이 찬물을 끼얹었다. 3선개헌에 손을 든 것이다.

개헌에 반대하던 김종필 지지 세력들은 당에서 떨어져 나갔고, 김종필은 이제 영원한 넘버 쓰리가 되었다. 당시 김종필을 지지했던 공화당 국회의원의 수,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야당 의원들의 수를 고려한다면 3선 개헌을 막을 수도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해 김종필은 1971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왜 돌아섰을까? 육영수의 설득 때문이었는가?

양 김은 왜 양보하지 않았을까?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1987년은 기념비적인 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기념비적이었던 1987년에 민주화를 지지했던 국민들은 충격적인 결과를 마주했다. 개헌을 통해 민주화가 되었다고 믿었지만,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신군부에 다시 승리를 안겨준 것이었다. ‘죽 쒀서 개 준다’는 속된 말이 현실이 되었다.

왜 이들은 서로 양보하지 못했을까? 누구든 먼저 한 사람이 한다면, 그다음에는 다른 한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당시 여론 조사 결과가 왔다갔다 했다는 설, 외부에서 일부러 두 사람을 부추겼다는 설, 이번에 안 되면 다음번에는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설 등 많은 추측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1987년에는 실패했지만, 1992년과 1997년 두 지도자는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3당합당과 DJP 연합이라는 큰 멍에를 안고 가야만 했다. 어쩌면 그 멍에로 인해 대중적 지지를 등에 업은 정권의 폭주로 이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1987년 선택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의 선택은 오히려 전두환과 노태우의 6·29 선언이 신의 한수였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인간은 비합리적이니까

역사적 인물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은 종종 연구자들에 의해서 합리화되곤 한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할까? 박헌영 때문에 북한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조봉암의 선택, 박정희의 권력이 공고해져 가고 있었고 미국마저도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선호했던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김종필의 선택, 상도동과 동교동의 갈등이 극심한 가운데 1987년 한 분이 양보를 한다고 해서 그다음에 대권을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단일화할 수 없었던 양 김씨의 불가피했던 선택.

그러나 인간을 꼭 합리적으로 그릴 필요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매일매일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발견하곤 하니까. 그렇기에 근대 사회과학의 합리적 선택 이론이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 조봉암도, 김종필도, 그리고 양 김씨도 모두 잘못된 분석이나 순간적인 실수로 예상치 못한 선택을 했을 수 있다. 합리적 자유주의자였던 버치 중위는 왜 허구헌날 속도위반 딱지를 떼었을까? 오히려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을 굳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 해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