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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 뒤에 숨은 또 다른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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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대를 살아본 세대로서 가혹한 군사 독재엔 체질적 거부감을 감출 수 없다. 여전히 깊은 분노가 남아있다. 하지만 경제 운용은 다르다. 적어도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는 죄가 없다. 전문가를 발탁해 믿고 맡긴 게 신의 한 수였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 기억난다. ‘자기보다 훌륭하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전 대통령에게 경제수석 임명장을 받으면서 김재익은 물었다. “저의 경제 정책은 인기가 없습니다. 어떤 저항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어 주시겠습니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신화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인재를 발탁한다고 끝이 아니다. 더 중요한 절반의 진실은 그 뒤에 숨어 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 뽑은 전두환
일 할 환경에다 보호막까지 돼줘
부동산 등 현 정부 3대 경제실정
하늘의 그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정권 초반에 경제 업무 처리는 기대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전 대통령이 다른 정보 라인을 통해 알아보니 엉뚱한 문제가 숨어 있었다. 한국은행 출신의 김재익은 뛰어난 인재였지만 정부의 행정 고시 출신들에 밀려 왕따에 가까운 비주류였다. 성장 우선주의에 젖어있던 관료들은 그의 경제 안정론에 싸늘했다. “실정도 모른 채 책상머리에만 앉은 이상주의자”라는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김 수석은 차관급이지만 한때 자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기획원·재무부의 1급 차관보들과 주로 업무를 협의했다. 부드럽고 예의 발랐다. 하지만 차관보→차관→장관을 거쳐 다시 장관→차관→차관보→경제수석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피드백이 문제였다. 『전두환 육성증언』에 따르면 전 대통령은 즉각 움직였다. 경제장관들을 불러모아 “앞으로 경제수석과 직접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장관 보고 외에도 실무자의 전망과 정책 방향까지 김 수석이 취합해 보고토록 교통정리를 했다.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대조적이다. 전문가와 공무원들에게 믿고 맡기기는커녕 차갑게 불신했다. 집권 2년 때 민주당 원내대표와 청와대 정책실장은 방송사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 모른 채 이런 뒷담화를 나누었다. "관료들이 정권 말기처럼 말을 안 듣는다” "잠깐만 틈을 주면 엉뚱한 짓들이나 하고”….

나름 소신을 갖고 움직인 관료들은 만신창이가 됐다. 은성수 전 금융위원장은 암호화폐와 공매도 재개에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가 난도질을 당했다. 민주당과 친문들은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망친다며 길길이 뛰었다. 혼자 혹독한 린치를 견뎌내야 했다. 은 위원장은 8월 퇴임 때 "아무리 욕을 먹어도 누군가는 했어야 할 정책”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비해 전 대통령은 든든한 병풍 역할을 해 주었다. 80년 9월 공정거래법을 도입할 때 재계와 정치권의 반발은 엄청났다. 김재익은 "공정 경쟁은 정의 사회 구현에도 절박한 과제”라고 보고했다. 이후 전 대통령은 반대론자를 향해 "거, 왜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느냐. 정의 사회 구현 안 할 거냐”며 입을 막았다.

그의 보호막은 골고루 펼쳐졌다. 1983년 예산 동결 때의 일이다. 국방예산 삭감에 불만을 품은 합참의 두 현역 준장이 권총을 찬 채 문희갑 예산실장 방에서 소동을 부렸다. 당시 군의 위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예산실장에게 "정치적 압력은 내가 막아 줄 테니 소신껏 하라”고 격려하며 두 장성을 좌천시켜 버렸다. (『한국의 재정 60년』)

반면 문재인 정부에선 홍남기 경제부총리조차 ‘홍두사미’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신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반대하자 친문들이 "적폐 모피아에 국민 권력의 매운맛을 보여주자”며 조리돌림을 해댔다. 지난 17일의 두 번째 전 국민 재난지원금 갈등 때는 민주당 윤호중 원내 대표가 직접 국정조사 카드까지 휘두르며 위협했다. 청와대는 팔짱을 끼었다. 이철희 정무 수석은 "청와대가 조정할 사안이 아니다. 국회에서 논의하라”며 개입하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 누가 소신 있게 일하겠는가.

그 결과는 경제 성적표로 나타난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10% 성장과 5% 물가상승률, 실업률 2.8%의 완전 고용까지 이뤄냈다. 86년엔 무역수지도 사상 처음 흑자를 기록했다.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성과는 참담하다. 이념에 치우친 섣부른 실험으로 부동산은 재앙 수준이고, 양극화 심화에다 실업은 증가했다. 탈원전으로 원전 생태계는 황폐화되고 전기요금은 치솟는다.

이제는 이재명 후보마저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부동산 문제, 특히 청년과 무주택 서민의 고통 가중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 말씀드린다”며 자세를 낮추었다. 탈원전 주장에도 "(원전은) 옳냐 그르냐를 떠나 이미 하나의 경제구조가 돼 버렸다”는 묘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워낙 민심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근 듯해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天網恢恢疎而不漏)”고 했다. 앞으로 이재명·윤석열 후보 중 누가 당선돼도 부동산, 탈원전, 소득주도 성장의 문재인 정부 3대 실정은 청문회·국정조사·특검의 3종 세트를 빠져나가기 어려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