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한국에 ‘지정학의 축복’ 구현할 대통령 나와야

중앙일보

입력 2021.11.2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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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외교 대통령이 절실한 이유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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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대선 후보들이 정해지며 본격적인 대선 정국에 진입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전에서 경제·복지 등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와 후보들의 도덕성과 위법 행위 여부 등이 핵심 쟁점이 되며,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야 할 외교·안보 분야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안타깝다.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주변 정세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온 지역임은 우리 민족이 겪어온 파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역대 한반도 왕조는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조공국으로서 중국 황실의 뜻을 거역하기 어려웠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로는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 마침내 일본 식민지가 되고, 2차 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에 승리해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2년 만에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었다.

과거 한반도는 중국·일본 등 강대국에 좌우되는 ‘지정학의 저주’에 빠져
한·미 동맹으로 미국 주도의 서방 진영에 합류해 ‘지정학의 축복’ 도래
외교를 정략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포퓰리즘적 유혹 이겨내고
한·미 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지정학적 이점 최대 활용해야

미·중 대결 시대, 전략적 지도자 절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은 중국·일본 등에 한반도 밖으로 뻗어 나갈 힘을 박탈당한 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주변 질서의 흐름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지정학의 저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동서 냉전과 맥락을 같이 해 1953년에 한·미 동맹이 맺어지고 한국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으뜸의 가치로 하는 미국 주도의 서방 진영에 서게 된 이래 우리에게 ‘지정학의 축복’의 시대가 도래했다.

서방 진영의 일원이 됨으로써 주변 강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동면해 왔던 한민족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로를 찾아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고 마침내 자유민주주의까지 쟁취하는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었다. 기울어지지 않은 평평한 운동장(level playing field)에서 한국 축구의 역대 성적이 중국·일본을 압도하고 있듯이, 지정학적 속박에서 벗어나 공평한 경쟁의 장이 주어지면 한국은 어떤 분야에서나 일본·중국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산업과 정치 발전의 발자취가 증명하고 있다. 반면 북한이 걸어온 길은 돌이켜 보는 것조차 가슴이 막히는 일이다. ‘지정학과 이념의 저주’가 북한을 황폐한 동토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한국은 남북 관계, 북한 핵 문제 외에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새롭고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중 대결 구도는 단순히 한·미 동맹과 한·중 관계뿐 아니라 한국의 외교·안보 전반에 압도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과 전략적 사고, 용기 있는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한국은 안보적으로 다자 연대의 수혜자

무엇이 훌륭한 외교 대통령을 만드는가? 첫째, 무엇보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겠다는 흔들림 없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한·미 동맹을 통한 ‘이념의 축복’이 없었다면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모두 성취한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은 적화 통일됐을 것이고, 미국이 주도한 국제 경제 질서가 없었다면 빈곤하고 초라한 반도로 머물렀을 것이다.

한국은 또 1992년 한·중 수교와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에 힘입어 중국과의 경제 교류를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려왔다. 한·중 무역 규모(지난해 2414억 달러)는 한·미(1316억 달러)와 한·일(711억 달러) 무역 규모를 합친 금액을 초과한 지 오래다. 중국은 북한의 후견국으로서 북한의 생존, 남북 관계, 나아가 한반도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나라다.

이같이 엄청난 경제적·안보적 중요성을 가지는 한·중 관계를 질적·양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의 중국에 대한 높은 경제적 의존도를 활용하여 한·미 동맹을 침하하려고 시도해온 것도 사실이다. 한·미 동맹이 약화되면 한·중 관계가 강화되고 중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이익이 증대되며 남북 관계도 증진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미 동맹이 흔들리면 중국이 경제력을 무기로 한국에 간섭할 여지를 넓혀 줄 것이며, 중국의 잠재적 안보 위협,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도 취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 서방 진영과의 관계 전반에 총체적 타격이 초래될 것임이 명백하다.

미·중 경쟁에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인권의 가치를 함께하는 국가들과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다음 달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분명히 중국과의 이념과 가치 대결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러한 가치 경쟁에서 권위주의적 집단지도체제를 가진 중국의 원군은 미미하다. 중국은 홍콩·신장위구르 탄압 등 국내 사태나 지난 2월 미얀마 군부 쿠데타 등 국제 사태에도 내정 불간섭 원칙을 주장하면서 국제적 비난과 제재에 반발하고 반대했다. 이제 중국은 대부분 개도국으로 구성된 비민주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비호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친중 국가의 지도를 확장해가는 전략으로 미국에 대응하고 있다. 결국 중국은 ‘가치의 논리’가 아닌 경제력·군사력을 무기로 한 ‘힘의 논리’를 근저에 깔고 대외정책을 추진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통령은 우리에게 일상의 삶이 된 지 오래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한국의 미래를 지켜나가는 것이며, 이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 한·미 동맹이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또 한·미 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화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한·중 파트너십의 공간을 확대할 것이다.

최근 쿼드(미·일·호주·인도 4개국 협의체)나 오커스(미·영·호주 외교·안보 3자 협의체) 등 중국을 의식한 다자간 협력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여러 사정으로 이러한 다자 협력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 안보적으로 이러한 다자 연대의 수혜자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한·미 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할 당위성이 커진다.

‘닫힌 민족주의’는 우리를 외톨이로 만들어

둘째, 대통령은 중요한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결정 하나하나가 바로 국익으로 직결된다는 무거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훌륭한 외교적 업적을 거둔 대통령으로 기억되려면 무엇보다 외교를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포퓰리즘적 유혹을 이겨내는 게 필요하다.

한국 외교의 중요한 부분들이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민족주의적 풍토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강제 징용, 위안부 등 한·일 과거사 문제도 그렇고 한·미 동맹이냐 친중·친북이냐, 친일이냐 반일이냐 하는 분열 상황도 그렇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요 외교 이슈에 관한 정책과 입장이 달라지니 많은 국민이 혼돈에 빠지고, 국론 분열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며,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민족주의가 싹트는 토양을 마련해준다. 바깥 세계에 눈감는 ‘닫힌 민족주의’는 우리를 외톨이로 만들 것이며, 진정한 국익을 생각하는 ‘열린 민족주의’는 세계를 우리의 무대로 만들 것이다.

대통령은 한국 외교의 최고 결정자(top diplomat)이자 최고 여론 선도자(top opinion leader)로서 한국을 열린 민족주의로 인도하는 최전선에 서야 한다. 국론이 분열된 외교 이슈에 대해서는 국익을 최우선 기준으로 파당적 입장을 초월하여 용기 있는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결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몸소 국민에게 설명하고 호소하여 초당적·국민적 컨센서스를 끌어내는 데 최선을 다할 책무가 있다. 당장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집착하면 결코 훌륭한 외교 업적을 거둘 수 없고, 길게 보면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 득점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현재 대선 후보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실용 외교는 정치적 편의주의에 좌우되지 않고 국익이라는 엄숙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고지도자의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지정학의 축복’ 가져온 김대중·노태우

차기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외교정책에 깊숙이 관여해야 한다. 집권 초기에 중요한 외교 사안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성급하게 미봉책으로 마무리하거나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서 차기 정부에 부담을 준 과거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번 대선 후보들은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 깊이 관여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겸허한 자세로 임해야 하며, 전문성과 전략이 뛰어나고 깊은 애국심을 가진 인재들을 구하여 최강의 팀을 만들기 바란다. 위대한 외교적 업적이 위대한 지도자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부분임은 동서양을 막론한 근세사의 많은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미·중 대결의 극히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한국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큰 도전이기도 하지만 큰 기회이기도 하다. 차기 대통령이 이런 시대의 흐름을 통찰해 한·일 관계를 고양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북방외교를 실현한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한국에 ‘지정학의 축복’을  가져온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외교적으로 좋은 기회의 창이 열려있는 이 시대에 국가 대사를 그르친다면, 늘 강대국들에 시달렸던 시기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당파 싸움으로 나라를 유린당하고 잃었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겠는가? 대통령은 역사와 마주하면서 역사와 함께 걸어가는 존재임을 후보자나 유권자 모두 마음에 새길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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