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미군 철수 빌미 줄 종전선언

중앙일보

입력 2021.11.24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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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종전선언을 할 경우 북한이 반드시 제기할 후속 이슈는 주한미군 철수다. 남·북·미가 모여서 전쟁 종료 ‘발표’(statement)를 넘어서 ‘선언’(declaration)을 했으니 북한으로선 ‘전쟁은 공식 종료됐고 미군 주둔의 근거도 사라졌다’고 주장할 기회가 만들어진다. 미군 철수는 북한의 숙원 사업이다. 조국해방전쟁이 미군 개입으로 실패했다고 믿는 북한에 미군이야말로 한반도 평화를 왜곡하는 제1의 모순이다. 그러니 한국 정부는 종전선언이 비핵화 입구라 설명해도 북한이 만들고 싶은 종전선언의 출구는 미군 철수다.

고위 공직자를 거쳐 지금은 물러난 군 장성에게서 오래전 들은 얘기다. “과거에 한·미 연합훈련을 했을 때였는데 한국군 부대의 무전기가 시원찮았다. 우연히 함께 훈련하는 미군 지휘관에게 이런 상황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이 지휘관이 하와이에서 통신 장비를 조달해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정말 하와이에서 미군 장비가 왔다.”

북한의 숙원사업은 미군 철수
미군 주둔 원인 제공자는 북한
외교정책의 잣대는 오직 국익
비핵화 없이는 종전선언 한계

방위비분담금 협상을 할 때 서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한 줄 한 줄 따지는 요즘과 달랐다는 ‘좋았던 시절’의 회고였다. 지금은 분위기가 더 험해졌다. 트럼프 미 행정부를 겪으면서 한·미 모두 돈 문제에 더욱 예민해졌다.

그럼에도 이럴 바에야 주한미군을 빼자고 얘기할 수 없는 건 주한미군 주둔을 부른 구조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주둔을 거론하면 미국에 사족을 못 쓰는 노인 세대의 미국 추종주의, 보수의 친미 사대주의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오히려 정반대다. ‘미군 철수’ 주장이야말로 30여 년 전 운동권의 ‘미제 식민지’ 추억에 파묻혀 사는 낡은 세대의 철 지난 구호에 불과하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우리가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미국이 한국전쟁 때 우리를 지켜줬으니 보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구촌을 둘로 갈라보니 미국이 선한 편이어서도 아니다. 미군으로 북한 위협을 막는 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효율적이어서다.

애초에 주한미군 주둔을 부른 원인 제공자는 북한이었다. 북한이 6·25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연인원 178만여 명의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올 일이 없었다. 북한은 6·25전쟁에 실패한 뒤에도 1·21 청와대 습격(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68년), KAL기 납북(69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83년), KAL기 폭파(87년), 연평도 포격(2010년) 등으로 남한의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주한미군의 필요성은 북한의 핵 개발로 더욱 커졌다. 핵의 대칭 전력은 핵밖에 없다. 재래식 무기로는 핵에 대한 억제력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핵 대응 전략은 오직 세 가지다. ①상대의 핵을 제거한다 ②우리도 핵을 갖는다 ③둘 다 안되면 임시방편으로 남의 핵으로 막는다 뿐이다. 지금 한국의 북핵 대처법은 ③번으로, 미국 핵으로 북한 핵을 막는 핵우산 전략이다. 그런데 북핵은 그대로인 채 주한미군부터 빠지면 ‘구멍 뚫린 핵우산’이 된다.

북한이 예컨대 서해에서 국지 도발을 감행했는데도 한국이 북한의 스커드 핵미사일 발사 징후 때문에 비례적 보복에 나서지 못하는 현실이 확인되는 순간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겪어야 한다. 이런 악몽 시나리오를 사전에 막는 게 ‘인계철선’ 주한미군이다. 북한은 주한미군이 있는 남한으로 스커드 핵미사일을 날려 보내기에 앞서 동해 또는 서태평양 어딘가에 숨어 있던 미군 오하이오급 잠수함에서 평양과 원산을 향해 보복 공격으로 날아올 트라이던트 전략핵미사일을 고민해야 한다.

외교안보 정책을 결정할 때의 잣대는 선악이나 대의명분이 아니라 철저한 이해타산, 즉 국익이다. 청나라 군대, 일본군이 주둔했던 용산에 미군도 주둔했다며 용산의 주한미군을 과거의 점령군 수준으로 거론하는 당국자가 있다면 한심하다는 얘기다. 정의를 내걸었던 노무현 정부도 국익을 위해 아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 파병 요구를 수용했다. 이라크전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음에도 한반도 안보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당시 주한미군 2사단의 ‘진짜’ 전투 병력인 506 공중강습부대를 한국에서 빼 이라크로 보낸 뒤 다시는 한반도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다시 종전선언으로 돌아가자. 종전선언은 한반도 평화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종전선언을 하면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게 명약관화하다.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면 최소한 북한 비핵화와 적화통일 포기 이정표가 전제돼야 한다. 결국 본질인 비핵화로 돌아간다. 북한 비핵화를 보장하지 않는 종전선언은 남과 북 양쪽에서 주한미군 철수론의 재료로만 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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