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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폭력의 개념 확장과 새로운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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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한국에는 문학상이 엄청 많다. 400개 가까이 된다는 추정치도 있다. 매일 누군가 문학상을 받는다는 얘기다. 어느 선배 소설가로부터 “문학상은 치질과 비슷하다”는 농담 겸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궁둥이 붙이고 오래 쓰다 보면 저절로 찾아오니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문학상의 홍수 속에서 특별한 상이 ‘오늘의 작가상’이다. 어쩌면 그런 범람 덕분에 특별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1977년 제정된 이 문학상은 민음사에서 주최하는데, 1회 수상작은 한수산의 『부초』다. 이후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같은 작품들이 이 상을 받으며 책으로 출간되었다.

문학상 심사하며 느낀 감수성
새 시대의 윤리 생성 과정일까
이 문제 제기의 다음 단계는

2015년 고(故) 박맹호 민음사 회장은 자신이 만든 상을 38년 만에 개편했다. 기존의 공모전 방식을 버리고 이미 출간된 단행본에 상을 주면서, 상금과 심사비를 대는 민음사는 아무런 다른 이득을 취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비슷비슷한 소설공모전이 넘쳐나는데 정작 한국 문학은 독자의 외면을 받는다는 반성 속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에 민음사는 상의 성격을 조금 조정했다. 현재는 어떤 작가가 처음으로 낸 소설 단행본만 후보로 올린다. 그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는 상관없다. 신인을 띄우겠다, 상업성과 ‘겹치기 수상’을 지양하겠다, 원로에게 주는 공로상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셈이다.

올해 ‘오늘의 작가상’ 심사에 참여했다. 본심에 올라온 책은 한 종을 빼고는 모두 단편집들이었다. 이 순간 가장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들이 최근 3, 4년 사이에 고민하고 생산한 결과물을 배우고 검토하는 기회였다. 그렇게 모아 읽다 보니 느슨하게나마 어떤 흐름이 느껴지기도 해서, 심사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도 나눴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글이 새로운 윤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윤리는 아직 막연하다. 젊은 세대로부터 감수성의 형태로, 산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정연한 이론적 기둥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대강 핵심은 폭력의 개념 확장인 듯하다. 이 감수성은 과거에는 폭력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것을 폭력으로 본다.

젊은 작가들이 이 새로운 도덕의 씨앗을 소화하려 분투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았다. 윤리적 도전에 진지하게 응수하려는 시도들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그 변화가 일으키는 균열을 탐구하는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폭력에 대한 내 감수성이 이 정도라니까요’ 하고 과시하거나 ‘이렇게 쓰긴 했지만 소수자 혐오는 절대 아닙니다’ 하고 알리바이를 만드느라 애쓰는 문장도 있긴 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나 행동을 모두 폭력으로 여기는 예민한 감각으로 주변을 살피면 결국 세상 전체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런 ‘발견’에서 체계적인 도덕 규칙들이 저절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남을 비판할 때는 만능이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지침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운동의 지지자들도 새로운 감수성의 필요성을 환기하며 그저 현실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추상적인 다짐으로 논지를 얼버무리기 일쑤다. 이 윤리적 문제 제기의 다음 단계가 궁금한 사람으로서는 퍽 답답한 노릇이다. 한때의 유행으로 지나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유와 평화에 대한 히피들의 주장이 그런 한계를 넘지 못했다.

아마도 최악은 ‘나는 피해자’라는 의식에 잠기게 되는 것이리라. 자신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환대와 폭력이라는 이분법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선입견과 불친절도 그가 받아서는 안 되는 대우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런 인생관을 지니고 살면 삶이 불행해지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지 않을까?

무조건적인 환대로 가득한 사회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니,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그렇게 구성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인(聖人)이 되자는 말이나 다름없는 목표 아닐까. 적어도 현 단계에서 이 감수성은 전통적인 가치들, 또 우리 삶의 다른 요소들(예를 들어 인간의 인지적 한계)과 매끄럽게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문학이 사회과학의 전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가는 때로 예언자가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계몽사상 안에 도사린 공허를, 조지 오웰은 기술과 전체주의의 결합을 우려했다.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도전에 대해 나를 포함해 여러 한국 소설가들이 이런저런 답안을 제출할 텐데, 독자들이 애정으로 살펴봐주시면 좋겠다. 참, 올해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아주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