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쿠데타 주도,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사과없이 떠나

중앙일보

입력 2021.11.24 00:02

업데이트 2021.11.24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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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꼴찌에서 두 번째로 육군사관학교(육사) 합격→신군부 쿠데타 주도→11·12대 대통령→백담사 칩거→내란 사건 무기징역 확정 후 사면.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삶은 명(明)보다는 암(暗)에서 주로 조망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1979년 12·12 군사반란, 1980년 5·17 내란 사건 등 굴곡진 역사의 고비마다 등장한다. 군인으로선 육군 대장, 정치인으로선 대통령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퇴임 후 싸늘한 여론 속에 여러 차례 법정에 섰다.

1931년 경남 합천 빈농의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형제 세 명이 사고와 질병으로 숨지는 비극을 겪으며 컸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육사에 입학하며 전환기를 맞는다. 훗날 그는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 있어 운명적 전환점이었다”(『전두환 회고록』)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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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그는 초창기 한직을 전전했지만, 1961년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 쿠데타 때 육사 생도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서서히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후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임명되는 등 출세를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속해 있던 군내 모임인 ‘오성회’(‘하나회’의 전신)도 육군 내 신진 주류로 부상했다.

육군 보안사령관(소장)으로 있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전 전 대통령이 정치의 전면에 서는 계기가 됐다.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고 본부장으로 사건 수사·처리를 맡았는데,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체포한 것은 물론 그해 12월 12일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마저 체포했다. 12·12 신군부 반란이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은 시국 수습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를 통해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등의 조치를 내리고 영장 없이 학생·정치인·재야 인사 2699명을 구금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학생 시위는 다음 날 대규모 광주시민의 항쟁(5·18 민주화운동)으로 번졌고, 군이 무력 진압하면서 유혈 사태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5·18 유혈 진압 책임 문제는 전 전 대통령이 숨을 거둘 때까지 따라다녔다.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사임하자 ‘군복을 입은 실권자’였던 육군 대장 전두환은 엿새 만인 8월 22일 예편했고, 닷새 만인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단독 입후보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같은 해 10월 27일 공포한 제5공화국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규정했지만, 대통령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를 고수해 민주 헌법으로서의 한계가 뚜렷했다. 전 전 대통령은 1981년 2월 다시 간선제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다.

전두환 정권 시대에 한국 경제는 저유가·저금리·저달러에 힘입어 이른바 ‘3저(低) 호황’을 누렸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잇따라 유치하며 국민의 시선을 돌리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하지만 끊임없는 민주화 요구를 배척하고 탄압해 5공 몰락을 불렀다. 특히 전 전 대통령 임기 말이던 1987년 1월 터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 진영의 분노를 키웠다. 여기에 그해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6월 민주항쟁에 전두환 정권은 결국 ▶직선제 개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약속하는 수습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발표한 6·29 선언이다.

1988년 퇴임한 전 전 대통령은 그해 5공 비리 청문회에 나와 광주 5·18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답하다 “살인마”(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 등 반발을 샀다.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 학생 시위에 떠밀리듯 부인 이순자 여사와 강원도 백담사로 내려가 769일간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에도 추락은 계속됐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항소심이 확정됐다. 그는 그해 12월 김영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2015년 8월 한국갤럽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실시한 역대 대통령 국정평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잘못한 일이 많다’는 답변이 60%로 ‘잘한 일이 많다’(16%)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부정평가 이유로는 ▶광주민주화운동 폭압(20%) ▶개인 비리와 부정부패(20%) ▶독재·강압(17%) 등이 꼽혔고, 긍정평가 이유로는 ▶경제정책과 경기·물가 안정(25%) ▶범죄자 소탕 및 사회 정화·질서(23%) 등이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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