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당나귀가 돼지가 됐어요

중앙일보

입력 2021.11.23 17:00

[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골길 80일] 17화

제 똥배 어때요. 허리띠가 채워지지 않아 가슴에 채웠어요. 아부지가 자꾸 먹여서 이렇게 됐어요. 배 나오니까 일하기 싫어지네요.

제 똥배 어때요. 허리띠가 채워지지 않아 가슴에 채웠어요. 아부지가 자꾸 먹여서 이렇게 됐어요. 배 나오니까 일하기 싫어지네요.

레옹은 부르고스에서부터 시작한 메세타 평원의 끝자락에 있다. 이 도시를 지나면서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바뀐다. 지루한 평야와 나지막한 산이 번갈아 나타난다. 오치나를 지나니 길 옆으로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평원은 망망대해와 같아서 그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다. 아침에 뜬 해가 오후가 다 지나가도록 11시 방향에서 정지해있다. 저러다가 6시가 넘으면 서산으로 쑥 넘어가 버린다.
길가에는 호택이가 좋아하는 풀들이 줄을 지어 있다. 까미노를 걸으며 사람들은 자기 안의 욕심을 내려놓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당나귀의 식욕은 못 말린다. 깨어있는 하루 23시간 중 21시간을 먹는데 쓸 정도니 말이다. 호택이는 까미노를 100번 걸어도 식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닮았나요? 호택이와 아부지.

닮았나요? 호택이와 아부지.

“당나귀와 걷는 동안 절대 풀을 먹이지 마세요. 길가의 풀을 보면 먹으려고 할 거예요. 그때마다 강하게 줄을 당겨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당나귀 조련사 아리츠가 신신당부했지만 그 로직이 깨어진 지 오래됐다. 나도 어느덧 호택이가 좋아하는 풀을 모조리 터득했다. 호택이가 국화과 식물을 제일 좋아한다. 길가에는 ‘큰방가지풀’과 ‘쇠서나물’이 가득했다. 이 풀을 만나면 호택이는 발을 멈추고 내 눈치를 본다. 그런 행동을 하면 줄을 낚아채 이를 저지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 멀리서 이 풀들이 나타나면 내 입에도 침이 돈다.
“호택아 빨리 가자. 저기 맛있는 풀이 있어.”
나는 호택이를 맛있는 풀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마음껏 먹도록 내 버려둔다. 이러다 보니 당연히 걷는 속도가 나지 않는다.
“에이 뭐 천천히 가면 되지 세월이 좀 먹겠어?”
언제부터인가 호택이가 잘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은 그냥 옛말이다. 예쁜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게 부모다.

그렇다고 호택이가 맛있는 풀만 먹는 것은 아니다. 큰방가지똥풀을 먹다가도 틈틈이 잔디류의 풀을 먹는다. 호택이는 편식이 좋지 않다는 걸 스스로 터득하고 있다. 사과도 두 개 이상 먹지 않는다. 당뇨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벌써 알고 있는 거다. 그것만이 아니다. 남의 집 정원에서 목줄을 풀어 놓아도 절대 화초나 재배하는 채소는 건드리지도 않는다. 이렇게 똑똑하고 대견한 당나귀라니.
우리는 지루한 옥수수 밭을 지나 마사리페(Mazarife)에 도착했다. 몇 가구 안돼 보이는 마을이었다. 이곳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다. 정원 옆에 너른 풀밭이 맘에 들어서였다. 이 알베르게 1층에는 이 마을에 하나뿐인 바가 있다. 모두 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다. 동네 남자들이 모두 바에 모인 듯 왁자지껄했다. 대화는 온통 당나귀인 듯했다. 이야기 중에 당나귀를 뜻하는 부로(Burro)라는 말이 자주 나오니 말이다.

그만 먹고 가자. 싫어요. 더 먹을래요.

그만 먹고 가자. 싫어요. 더 먹을래요.

다음날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 당나귀 주인이오?”
술이 좀 취하신 어르신이 큰 소리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가슴이 철렁했다. 호택이가 밤새 무슨 사고라도 쳤나.
“아니 당나귀를 저렇게 많이 먹이면 어쩝니까? 당나귀가 배밖에 안 보여요. 비만이라고요. 당나귀는 살이 찌면 일을 안 해요.”
당나귀 잘 먹였다고 야단을 맞을 줄은 몰랐다.
“저녁에 당나귀를 기둥에 바싹 묶어놔야 해요. 먹지 않고 자도록 말예요.”
당나귀는 앉아서 자나 서서 자나 똑같다고 했다. 밤이 되면 당나귀를 기둥에 바싹 묶어 놓아야 풀을 뜯지 않고 잠을 잘 잔다고 했다. 하지만 서서 밤잠을 자는 모습이 거북하다.
“오늘은 절대 많이 먹이지 말아요. 저 배 좀 봐요. 사흘은 안 먹어도 되겠어요.”

마을을 나서니 다시 끝없는 옥수수 밭이다. 풀들이 또 호택이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외면하고 걷는 것은 둘에게 다 고역이었지만 호택이 건강을 위해 참았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해 뒤를 돌아보면 마을은 그대로였다. 평야의 시간은 느리고 길다. 얼마가 지났을까. 길가에 떨어진 옥수수 알갱이들이 보였다. 옥수수를 싣고 가던 트럭이 흘린 것 같았다. 호택이가 보고는 흥분하면서 먹기 시작했다. 옥수수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 처음 알았다. 모래에 섞인 알갱이를 입술로 골라 먹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호택아 마을 나오면 내가 사줄게. 옥수수는 나도 좋아하거든? 그러니 그냥 가자.”

솔직히 밭에 들어가 몇 개 따주고 싶었다. 머잖은 거리에 여러 개의 건물이 있는 농업용 창고가 보였다. 정문 앞에 풀들이 무성해서 쉬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호택이가 좋아하는 풀들이어서 옥수수 생각을 잊은 것 같았다.
이때 개가 짖더니 웬 사내가 나왔다. 그는 철조망에 붙어 우리를 보고는 길 건너 옥수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옥수수 따서 당나귀 먹이세요. 아주 영양이 많아요.”
“주인도 없는데 어떻게 따요. 저는 순례자거든요.”
순례자라면 적어도 예의는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저거 다 제거예요.”
옥수수밭 주인이 걱정 말고 따라고 했다.
“그럼 당신이 따 주세요. 제가 따는 것은 좀 그러네요.”

문을 열고 나온 옥수수밭 주인 훌리오. 나 당신 알아요. 까미노 SNS에 올라오는 소식 봤어요. 하하하.

문을 열고 나온 옥수수밭 주인 훌리오. 나 당신 알아요. 까미노 SNS에 올라오는 소식 봤어요. 하하하.

사내는 자동문을 열고 나오더니 밭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아주 실한 옥수수를 양손 가득 들고 나와 호택이에게 줬다. 호택이는 눈을 크게 뜨고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내 마음마저 흐뭇해졌다.
“영양가가 많으니 하루에 두 개 이상은 주지 마세요.”
주인은 옥수수를 잔뜩 챙겨주었다. 당부도 잠깐, 저녁이 되자 호택이에게 옥수수를 먹이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일었다. 기어코 4개를 주고 말았다.
‘내일은 먹이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널린 게 옥수수인데 당나귀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어요...

널린 게 옥수수인데 당나귀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어요...

밭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갑니다.

밭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갑니다.

저 뒤에 저게 다 옥수수.

저 뒤에 저게 다 옥수수.

살이 통통하게 오른 옥수수. 호택이한테 하루 2개만 주세요. 더 먹이면 책임 못져요.

살이 통통하게 오른 옥수수. 호택이한테 하루 2개만 주세요. 더 먹이면 책임 못져요.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호택이 표정이 황홀합니다.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호택이 표정이 황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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